전북 남원시 향교동 628
이는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30년(1597) 정유재란< 丁酉再亂 >때 남원성< 南原城 >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 倭賊 >과 항전하다 전사한 군·관·민< 軍·官·民 >을 합장한 묘이다. 왜군은 임진란< 壬辰亂 > 때의 패배< 敗北 >가 전라도< 全羅道 > 지방< 地方 >을 점령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 丁酉再亂 >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 7월말 이 계획에 따라 왜군 11만명이 좌우군< 左右軍 >으로 나뉘어 우군은 황석산성< 黃石山城 >을 좌군은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 要衝地 >로 나라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 全羅兵使 > 이복남< 李福男 >과 광양현감< 光陽縣監 > 이춘원< 李春元 >, 조방장< 助防將 > 김경로< 金敬老 >의 군사와 명< 明 >의 부총병< 副總兵 > 양위옌< 楊元 >의 3천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8월 7일 왜군의 선봉대< 先鋒隊 >가 남원 지역에 모습을 나타냈고 13일에는 왜군의 주력군이 남원성 아래 집결하여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동문에는 양위옌, 남문에는 일군< 日軍 >의 천총< 千摠 > 지앙삐야오< 蔣表 >, 서문에는 마오< 毛 > 청시엔< 承先 >, 북문에는 이복남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14, 15일 이틀동안 혈전이 전개되었다.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 衆寡不敵 >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ㄷ 직전 양위옌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 接伴使 > 정기원< 鄭期遠 >, 병사< 兵使 > 이복남< 李福男 >, 방어사< 防禦使 > 오응정< 吳應井 >, 조방장< 助防將 > 김경로< 金敬老 >, 별장< 別將 > 신호< 申灝 >, 부사< 府使 > 임현< 任鉉 >, 통판< 通判 > 이덕회< 李德恢 >, 구례현감< 求禮縣監 > 이춘원< 李春元 > 등이 전사하였다. 이밖에 남문을 통해 성안에 침입한 왜군에 의해 학살된 군관민의 수는 거의 만여명에 달하였다. 난후 순절< 殉節 >한 시신을 한 곳에 합장< 合葬 >하는 한편 광해군< 光海君 > 4년(1612) 충렬사< 忠烈祠 >를 건립하여 접반사 정기원 등 7충신을 받들었다. 처음 이 묘는 남원역< 南原驛 >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현재위치로 이전되었다.
이는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30년(1597) 정유재란< 丁酉再亂 >때 남원성< 南原城 >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 倭賊 >과 항전하다 전사한 군·관·민< 軍·官·民 >을 합장한 묘이다. 왜군은 임진란< 壬辰亂 > 때의 패배< 敗北 >가 전라도< 全羅道 > 지방< 地方 >을 점령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정유재란< 丁酉再亂 > 때는 전라도 지역을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 7월말 이 계획에 따라 왜군 11만명이 좌우군< 左右軍 >으로 나뉘어 우군은 황석산성< 黃石山城 >을 좌군은 남원을 공격하였다.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 要衝地 >로 나라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 全羅兵使 > 이복남< 李福男 >과 광양현감< 光陽縣監 > 이춘원< 李春元 >, 조방장< 助防將 > 김경로< 金敬老 >의 군사와 명< 明 >의 부총병< 副總兵 > 양위옌< 楊元 >의 3천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8월 7일 왜군의 선봉대< 先鋒隊 >가 남원 지역에 모습을 나타냈고 13일에는 왜군의 주력군이 남원성 아래 집결하여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동문에는 양위옌, 남문에는 일군< 日軍 >의 천총< 千摠 > 지앙삐야오< 蔣表 >, 서문에는 마오< 毛 > 청시엔< 承先 >, 북문에는 이복남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14, 15일 이틀동안 혈전이 전개되었다. 쳐들어오는 왜군과 맞서 침식도 잊은 채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 衆寡不敵 >으로 다음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ㄷ 직전 양위옌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 이 싸움에서 접반사< 接伴使 > 정기원< 鄭期遠 >, 병사< 兵使 > 이복남< 李福男 >, 방어사< 防禦使 > 오응정< 吳應井 >, 조방장< 助防將 > 김경로< 金敬老 >, 별장< 別將 > 신호< 申灝 >, 부사< 府使 > 임현< 任鉉 >, 통판< 通判 > 이덕회< 李德恢 >, 구례현감< 求禮縣監 > 이춘원< 李春元 > 등이 전사하였다. 이밖에 남문을 통해 성안에 침입한 왜군에 의해 학살된 군관민의 수는 거의 만여명에 달하였다. 난후 순절< 殉節 >한 시신을 한 곳에 합장< 合葬 >하는 한편 광해군< 光海君 > 4년(1612) 충렬사< 忠烈祠 >를 건립하여 접반사 정기원 등 7충신을 받들었다. 처음 이 묘는 남원역< 南原驛 > 부근에 있었으나 1964년 현재위치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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