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군 태안읍 기안리 산7
이곳은 고려시대< 高麗時代 > 문신< 文臣 >이었던 백천장 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수원백씨< 水原白氏 >의 시조인 송계공< 松溪公 > 우경< 宇經 >의 후손< 後孫 >이다. 진사< 進士 >로 문과< 文科 > 등과< 登科 > 후 한림학사< 翰林學士 >와 정당문학< 政堂文學 >을 역임하였으며 원< 元 >나라에 유학, 국자진사< 國子進士 > 한림학사< 翰林學士 > 좌복야사공대사도< 左僕射司空大司徒 > 우승상< 右承相 >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 >를 역임했고 연로< 年老 >하여 귀국< 歸國 >후 수성백< 隨城伯 >에 봉< 封 >했고 그후 수원에 거주하다 85세에 졸< 卒 >하였다. 부음< 訃音 >을 들은 고려< 高麗 > 충선왕< 忠宣王 >이 심히 애도하여 예관< 禮官 >을 보내 치제< 致祭 >하고 시호< 諡號 >를 문익< 文益 >이라 하였다.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때 사도세자릉< 思悼世子陵 >을 화산< 華山 >으로 옮길 때 10리 이내 민가< 民家 >의 산소< 山所 >는 이장< 移葬 >하게 했으나 선생의 묘는 국가< 國家 >에서 기< 旗 >를 나열삽입< 羅列揷入 >하여 그대로 보존하였다. 그후로 이곳 동명< 洞名 >을 기전동< 旗田洞 >으로 불러왔으며 선생의 묘도 천사릉< 天使陵 >으로 일컬어왔다.
이곳은 고려시대< 高麗時代 > 문신< 文臣 >이었던 백천장 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수원백씨< 水原白氏 >의 시조인 송계공< 松溪公 > 우경< 宇經 >의 후손< 後孫 >이다. 진사< 進士 >로 문과< 文科 > 등과< 登科 > 후 한림학사< 翰林學士 >와 정당문학< 政堂文學 >을 역임하였으며 원< 元 >나라에 유학, 국자진사< 國子進士 > 한림학사< 翰林學士 > 좌복야사공대사도< 左僕射司空大司徒 > 우승상< 右承相 > 금자광록대부< 金紫光祿大夫 >를 역임했고 연로< 年老 >하여 귀국< 歸國 >후 수성백< 隨城伯 >에 봉< 封 >했고 그후 수원에 거주하다 85세에 졸< 卒 >하였다. 부음< 訃音 >을 들은 고려< 高麗 > 충선왕< 忠宣王 >이 심히 애도하여 예관< 禮官 >을 보내 치제< 致祭 >하고 시호< 諡號 >를 문익< 文益 >이라 하였다.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때 사도세자릉< 思悼世子陵 >을 화산< 華山 >으로 옮길 때 10리 이내 민가< 民家 >의 산소< 山所 >는 이장< 移葬 >하게 했으나 선생의 묘는 국가< 國家 >에서 기< 旗 >를 나열삽입< 羅列揷入 >하여 그대로 보존하였다. 그후로 이곳 동명< 洞名 >을 기전동< 旗田洞 >으로 불러왔으며 선생의 묘도 천사릉< 天使陵 >으로 일컬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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