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2∼3리 931
이 성< 城 >은 신흥사< 神興寺 >와 그 아래의 큰 계곡을 포함한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축성< 築城 >한 포곡식< 包谷式 > 산성< 山城 >이다. 지금까지 성의 자취가 비교적 분명하게 남아 있어 성문지< 城門址 > 외에는 전체의 윤곽을 거의 식별할 수 있다. 성벽의 일부는 뚜렷하게 벽체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바깥을 향해 물매가 있도록 석축< 石築 >하고 안쪽으로 석재< 石材 >를 메운 산성< 山城 > 축조< 築造 >의 일반형식도 볼 수 있다. 신라< 新羅 > 내물왕대< 奈勿王代 >(356∼402, 재위)의 축성이라는 4세기 말엽 축성설이 있으나 이때는 백제< 百濟 >의 영역이었으므로 당초는 백제의 축성이었다가 고구려< 高句麗 >·신라< 新羅 >에 의해 계속 수축되어온 유서 깊은 성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 약 1km, 폭 5m, 높이 4∼5m의 규모로서, 삼국시대< 三國時代 > 산성으로는 큰 것에 속한다.
이 성< 城 >은 신흥사< 神興寺 >와 그 아래의 큰 계곡을 포함한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축성< 築城 >한 포곡식< 包谷式 > 산성< 山城 >이다. 지금까지 성의 자취가 비교적 분명하게 남아 있어 성문지< 城門址 > 외에는 전체의 윤곽을 거의 식별할 수 있다. 성벽의 일부는 뚜렷하게 벽체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바깥을 향해 물매가 있도록 석축< 石築 >하고 안쪽으로 석재< 石材 >를 메운 산성< 山城 > 축조< 築造 >의 일반형식도 볼 수 있다. 신라< 新羅 > 내물왕대< 奈勿王代 >(356∼402, 재위)의 축성이라는 4세기 말엽 축성설이 있으나 이때는 백제< 百濟 >의 영역이었으므로 당초는 백제의 축성이었다가 고구려< 高句麗 >·신라< 新羅 >에 의해 계속 수축되어온 유서 깊은 성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 약 1km, 폭 5m, 높이 4∼5m의 규모로서, 삼국시대< 三國時代 > 산성으로는 큰 것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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