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6
죽산은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는 중부 내륙의 길목이어서 일찍부터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고려 고종<高宗> 23년(1236) 몽고군이 이곳의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고려군은 적과 싸워 이겼다. 몽고군은 다시 포<砲>를 앞세워 공격을 하였지만 역습을 당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 갔다. 이 때 성을 지킨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는 일찍이 귀주성<歸州城> 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알고 있어 대비를 하였기에, 백성들은 그를 '귀신' 또는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을 보수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진을 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성의 둘레는 1,688m이고, 높이 2.5m 안팎이며 부분적으로 수리를 많이 하였다. 남쪽 성벽의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는 성벽의 양쪽 끝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雉城>이 남아 있으며, 남문 쪽 성 바깥에는 당시에 팠던 도랑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북문 옆에는 네모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이 곳에 지휘대가 있었던 것 같다. 성 안에는 몽고 침입 때 큰 전과를 올린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죽산은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는 중부 내륙의 길목이어서 일찍부터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고려 고종<高宗> 23년(1236) 몽고군이 이곳의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고려군은 적과 싸워 이겼다. 몽고군은 다시 포<砲>를 앞세워 공격을 하였지만 역습을 당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 갔다. 이 때 성을 지킨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는 일찍이 귀주성<歸州城> 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알고 있어 대비를 하였기에, 백성들은 그를 '귀신' 또는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이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을 보수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진을 치기도 하였다. 현재 이 성의 둘레는 1,688m이고, 높이 2.5m 안팎이며 부분적으로 수리를 많이 하였다. 남쪽 성벽의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는 성벽의 양쪽 끝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雉城>이 남아 있으며, 남문 쪽 성 바깥에는 당시에 팠던 도랑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북문 옆에는 네모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이 곳에 지휘대가 있었던 것 같다. 성 안에는 몽고 침입 때 큰 전과를 올린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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