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교동 89-7
이 우물은 신라< 新羅 > 김유신< 金庾信 > 장군< 將軍 >의 집에 있던 우물로서 화강암< 花崗岩 >을 벽돌처럼 만들어 쌓아올리고, 그 위로 네변에 거칠게 다듬은 긴 장대석< 長臺石 >을 이중으로 쌓아 올린 후 맨 위에 잘 다듬은 ㄱ자 장대석 두 개를 짜 맞추어 정사각형으로 짜임새있게 아물렸다. 이 우물에 얽힌 이야기로 김유신 장군이 오랜 동안 전쟁터에서 보내다 돌아오다 되짚어 전장< 戰場 >으로 떠날 때 자신의 집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얼마쯤 가다 말을 멈추고 이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하여 말 위에 탄채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일대가 김유신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보고 있으며 비각 속에 있는 유허비< 遺墟碑 >는 조선< 朝鮮 > 고종< 高宗 > 9년(1872)에 세운 것이다.
이 우물은 신라< 新羅 > 김유신< 金庾信 > 장군< 將軍 >의 집에 있던 우물로서 화강암< 花崗岩 >을 벽돌처럼 만들어 쌓아올리고, 그 위로 네변에 거칠게 다듬은 긴 장대석< 長臺石 >을 이중으로 쌓아 올린 후 맨 위에 잘 다듬은 ㄱ자 장대석 두 개를 짜 맞추어 정사각형으로 짜임새있게 아물렸다. 이 우물에 얽힌 이야기로 김유신 장군이 오랜 동안 전쟁터에서 보내다 돌아오다 되짚어 전장< 戰場 >으로 떠날 때 자신의 집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얼마쯤 가다 말을 멈추고 이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하여 말 위에 탄채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일대가 김유신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보고 있으며 비각 속에 있는 유허비< 遺墟碑 >는 조선< 朝鮮 > 고종< 高宗 > 9년(1872)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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