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천북면 화산리 942-1
요지는 화산리 마을에서 서북편의 작은 소나무밭이 있는 남향한 산기슭에 위치한다. 주위의 밭에 토기편과 요벽편들이 4개소에 산포되어 있는데, 밭을 갈 때 지하에서 다량의 토기편들이 나온다. 밭은 약 2∼3°로 경사가 져있어 가마의 유구는 산기슭과 밭에 걸쳐서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의 밭에서 수습된 토기편들은 고화도의 번조 때문에 찌그러지거나 서로 엉켜붙은 것이 많으며, 가마 벽편들은 완전 환원번조된 굳은 점토질이어서 발굴하면 보존상태가 양호한 가마가 발견될 것으로 믿어진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은 대부분 7∼8세기로 추정되는 인화문토기류<印花文土器類>들이며, 이중에 약 20% 가량에 회유<灰釉>가 시유되어 있어 크게 주목된다. 토기의 기형에는 고배·완·발·배<杯>·광구병·장경호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대형의 항아리와 합<盒>모양의 파편도 출토된다. 토기에 베풀어진 인화문의 문양종류도 매우 다양하며 수십종에 이른다. 화산리의 인근 지역인 동산리<東山里>·화곡리<花谷里>·망성리<望星里> 등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인화문토기 요지들이 발견되고 있어 화산리 요지를 포함한 이 지역이 통일신라 전기에 경주지역에 사용된 토기들의 주요 공급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들 요지에서 출토된 토기편들은 7∼8세기 통일신라토기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화산리 요지에서 출토되는 회유토기의 존재는 앞 시기의 고화도 경질토기에 나타나는 자연유를 한단계 발전시켜 인공으로 시유한 것으로, 연유도기<鉛釉陶器>의 존재와 함께 이무렵에 이미 시유기법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토기 제작기술이 우수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 회유기법이 바탕이 되어 곧이어 청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 회유토기의 존재는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기술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증명하는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
요지는 화산리 마을에서 서북편의 작은 소나무밭이 있는 남향한 산기슭에 위치한다. 주위의 밭에 토기편과 요벽편들이 4개소에 산포되어 있는데, 밭을 갈 때 지하에서 다량의 토기편들이 나온다. 밭은 약 2∼3°로 경사가 져있어 가마의 유구는 산기슭과 밭에 걸쳐서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대의 밭에서 수습된 토기편들은 고화도의 번조 때문에 찌그러지거나 서로 엉켜붙은 것이 많으며, 가마 벽편들은 완전 환원번조된 굳은 점토질이어서 발굴하면 보존상태가 양호한 가마가 발견될 것으로 믿어진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토기들은 대부분 7∼8세기로 추정되는 인화문토기류<印花文土器類>들이며, 이중에 약 20% 가량에 회유<灰釉>가 시유되어 있어 크게 주목된다. 토기의 기형에는 고배·완·발·배<杯>·광구병·장경호 등 여러 종류가 있으며, 대형의 항아리와 합<盒>모양의 파편도 출토된다. 토기에 베풀어진 인화문의 문양종류도 매우 다양하며 수십종에 이른다. 화산리의 인근 지역인 동산리<東山里>·화곡리<花谷里>·망성리<望星里> 등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인화문토기 요지들이 발견되고 있어 화산리 요지를 포함한 이 지역이 통일신라 전기에 경주지역에 사용된 토기들의 주요 공급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들 요지에서 출토된 토기편들은 7∼8세기 통일신라토기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화산리 요지에서 출토되는 회유토기의 존재는 앞 시기의 고화도 경질토기에 나타나는 자연유를 한단계 발전시켜 인공으로 시유한 것으로, 연유도기<鉛釉陶器>의 존재와 함께 이무렵에 이미 시유기법을 알고 있었을 정도로 토기 제작기술이 우수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 회유기법이 바탕이 되어 곧이어 청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 회유토기의 존재는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기술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증명하는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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