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미륵사는 백제 30대 무왕(武王 600 ∼ 641)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17세기 경에 폐사(廢寺)하고 그 뒤 서탑(西塔)과 당간지주 등 일부 석물만 남게되었고 사역(寺域)은 경작지와 민가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미륵사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1910년대 일본 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의하면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품(品)자 모양으로 세 개를 합하여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1974년과 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에 의하여 동탑지(東塔址)가 조사되고 그 후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위하여 사역내에 있던 민가(民家)를 모두 옮기고 발굴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1980년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밝혀진 사실은 품(品)자 모양의 가람배치가 아닌,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木塔)이 있으며 각 탑의 북쪽에는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미륵사는 백제 30대 무왕(武王 600 ∼ 641)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언제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17세기 경에 폐사(廢寺)하고 그 뒤 서탑(西塔)과 당간지주 등 일부 석물만 남게되었고 사역(寺域)은 경작지와 민가로 변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미륵사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1910년대 일본 학자에 의하여 조사된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의하면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가람이 품(品)자 모양으로 세 개를 합하여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1974년과 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圓光大學校)에 의하여 동탑지(東塔址)가 조사되고 그 후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위하여 사역내에 있던 민가(民家)를 모두 옮기고 발굴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1980년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밝혀진 사실은 품(品)자 모양의 가람배치가 아닌,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木塔)이 있으며 각 탑의 북쪽에는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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