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청사(國淸寺)는 금정구 금성동 397번지 일대로서 정확하게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만 알려져 있다. 국청사의 현판에는 '숙종 29년(1703년) 금정산성 중성을 쌓은 후 적을 막고 지키어 나라를 보호하니 그 이름을 국청사라 칭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름의 뜻도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과도 같이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서다' 혹은 '나라가 외적의 더러운 발길에 짓밟힘을 막고 깨끗한 국토를 수호하다'라는 것이다. 금정산성 성내 사찰인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을 방어한 호국사찰로서 당당히 등장하고 있다. 국청사는 1703년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 중창한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 승군작대(僧軍作隊)의 승영으로 기능하였던 곳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이곳 국청사는 임란 당시 산성을 지키는 승병장이 거주하여 전략기지의 역할을 한 승군작대의 사령부격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청사에는 당시 승병장이 사용한 '금정산성 승장인(金井山城僧長印)'이라는 철제인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승장인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승군작대의 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 하다고 단정해도 좋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 가능성은 짐작해볼 수 있다 하겠다. 또한 '국청사는 삼천대천 시방세계의 구국혼령과 성도 이름도 없이 법호와 법명만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고귀한 의성군들, 여러 혼령들과 함께 천도제를 정성껏 봉행해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인 영조 42년(1766년) 조엄 경상감사가 억불숭유정책 속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온 호국도량 국청사의 ≪寺誌≫에 잘 나타나 있다.
국청사의 건축물은 보면 국청사는 대웅전이 있는 사찰의 뜰을 들어서기에 앞서 그 언덕 아래에 있는 연못을 먼저 만난다. 200평 가량의 이 연못 가운데 최근 세운 3층석탑이 서있다. 또 연못 주위에는 몇가지 석물들도 놓여 있어 눈길을 끌게 한다. 그 옛날 둥근 연못 남쪽에는 약수 우물이 솟았는데, 위에는 더운 약수가, 밑에는 찬 약수가 나왔다는 영험한 우물이라,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법당에서 염불을 하면 전쟁중에 죽어가는 신음 소리, 날짐승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나서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창봉선백과 혜성 주지스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1982년에 맑은 약수가 샘솟는 연못을 확장하고 한가운데 지장보살 보원 3층탑을 세워 자연석으로 연못을 아름답게 조경하였다. 3층탑 기단부에 4마리의 용은 보주를 희롱하고 기단 상층에는 12지신상을 사방으로 배치하였으며, 탑신부 1층 동서남북 사면에는 관음 지장허공장 보살이 좌정하고 있다. 탑두부 상부에 8방으로 뻗은 가지 끝에 연꽃이 피어 있다. 지장 3층탑을 건립하여 구천에 헤매는 영가들을 용을 타고 극락세계로 천도하였다. 그 뒤부터는 울음소리가 가시고 지장기도 도량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기도도량이 되었다. 연못 가운데 3층탑을 세움으로써 영령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자리는 산성 동문에서 보면 여자가 누워있는 음부의 지형에 남쪽과 동쪽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한 좌청룡 우백호의 버팀인 영지라 할 수 있다고도 한다.
국청사의 당우는 근래 복원불사를 마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이 전부이며 가건물 형식의 요사체가 있을 뿐이다. 이 대웅전은 범어사의 대웅전(보물 제434호)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을 비롯하여 좌협시인 문수보살과 우협시인 보현보살이 모셔져있다. 그러나 묵직한 이 건물에는 아직 단청도 하지 못한 그대로이며, 주변의 조경 등 많은 부분에서 미완의 상태이다. 국청사는 금정산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산성마을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값진 문화유산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 사찰은 어쩐 셈인지 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대중교통]
동래 금강공원 식물원에서 산성행 버스이용 산성마을에서 하차하여 도보
그 이름의 뜻도 '청정한 마음으로 수행과도 같이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서다' 혹은 '나라가 외적의 더러운 발길에 짓밟힘을 막고 깨끗한 국토를 수호하다'라는 것이다. 금정산성 성내 사찰인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을 방어한 호국사찰로서 당당히 등장하고 있다. 국청사는 1703년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 중창한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 승군작대(僧軍作隊)의 승영으로 기능하였던 곳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이곳 국청사는 임란 당시 산성을 지키는 승병장이 거주하여 전략기지의 역할을 한 승군작대의 사령부격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청사에는 당시 승병장이 사용한 '금정산성 승장인(金井山城僧長印)'이라는 철제인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승장인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승군작대의 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 하다고 단정해도 좋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 가능성은 짐작해볼 수 있다 하겠다. 또한 '국청사는 삼천대천 시방세계의 구국혼령과 성도 이름도 없이 법호와 법명만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고귀한 의성군들, 여러 혼령들과 함께 천도제를 정성껏 봉행해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인 영조 42년(1766년) 조엄 경상감사가 억불숭유정책 속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온 호국도량 국청사의 ≪寺誌≫에 잘 나타나 있다.
국청사의 건축물은 보면 국청사는 대웅전이 있는 사찰의 뜰을 들어서기에 앞서 그 언덕 아래에 있는 연못을 먼저 만난다. 200평 가량의 이 연못 가운데 최근 세운 3층석탑이 서있다. 또 연못 주위에는 몇가지 석물들도 놓여 있어 눈길을 끌게 한다. 그 옛날 둥근 연못 남쪽에는 약수 우물이 솟았는데, 위에는 더운 약수가, 밑에는 찬 약수가 나왔다는 영험한 우물이라,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법당에서 염불을 하면 전쟁중에 죽어가는 신음 소리, 날짐승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나서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창봉선백과 혜성 주지스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1982년에 맑은 약수가 샘솟는 연못을 확장하고 한가운데 지장보살 보원 3층탑을 세워 자연석으로 연못을 아름답게 조경하였다. 3층탑 기단부에 4마리의 용은 보주를 희롱하고 기단 상층에는 12지신상을 사방으로 배치하였으며, 탑신부 1층 동서남북 사면에는 관음 지장허공장 보살이 좌정하고 있다. 탑두부 상부에 8방으로 뻗은 가지 끝에 연꽃이 피어 있다. 지장 3층탑을 건립하여 구천에 헤매는 영가들을 용을 타고 극락세계로 천도하였다. 그 뒤부터는 울음소리가 가시고 지장기도 도량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기도도량이 되었다. 연못 가운데 3층탑을 세움으로써 영령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자리는 산성 동문에서 보면 여자가 누워있는 음부의 지형에 남쪽과 동쪽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한 좌청룡 우백호의 버팀인 영지라 할 수 있다고도 한다.
국청사의 당우는 근래 복원불사를 마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이 전부이며 가건물 형식의 요사체가 있을 뿐이다. 이 대웅전은 범어사의 대웅전(보물 제434호)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을 비롯하여 좌협시인 문수보살과 우협시인 보현보살이 모셔져있다. 그러나 묵직한 이 건물에는 아직 단청도 하지 못한 그대로이며, 주변의 조경 등 많은 부분에서 미완의 상태이다. 국청사는 금정산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산성마을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값진 문화유산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이 사찰은 어쩐 셈인지 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대중교통]
동래 금강공원 식물원에서 산성행 버스이용 산성마을에서 하차하여 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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