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격퇴시킨 사실을 기록한 승첩비<勝捷碑>가 서있던 옛터이다. 황산은 남원군 운봉면 동쪽에 자리잡은 해발 약 7백m의 바위산인데 이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전투사실과 이성계의 전공이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비석이 바로 황산대첩비였다. 이 비가 이루어진 것은 1577년(선조 10년)으로서 당시 왕명에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여성군 송인<礪城君 宋寅>이 글씨를 써서 운봉현감 박광옥<朴光玉>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비석이 파괴되어 일부의 파편만 남아 있던 것을 해방 후 그 자리에 복원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 대대적인 정화사업이 이루어져 새롭게 단장되었다. 황산대첩은 1380년(우왕 6년) 9월에 벌어진 전투로서 왜구의 주력부대가 지리산을 넘어 운봉의 인월역<引月驛>에 주둔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들은 성주지방을 공격한 후 계속 함양 부근까지 쳐들어와 아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어서 왜적들은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불태운 뒤 가까운 인월역에 머물면서 계속 북상 공격할 태세를 갖춤으로써 고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이미 해주지방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로,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림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당시 양측 군사들은 황산의 서북방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버팀으로써 아군으로서는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장<主將> 이성계의 용전<勇戰>과 과감한 작전지휘에 따라 총공격을 펼친 결과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포함하여 무수한 왜구들을 사살함으로써 전사한 적병들의 피가 강물을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포획한 적의 말만도 1,600여필에 달하였으며, 적의 대군이 거의 전멸한 가운데 70여명만이 생존해 달아났을 만큼 큰 전승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격멸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였으니, 한국 전투사에서 크게 두드러진 쾌거로서 그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수록되었을 정도로 이름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비지<碑址>에는 비신이 오석<烏石>으로 복원된 높이 4.25m의 대첩비가 서 있는데, 이것은 용을 새긴 이수<이首>와 1.25m의 귀부<龜趺>를 갖추고 있다. 1972년에 신석호<申奭鎬>씨가 국문으로 황산대첩의 사적<事蹟>을 기술한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1973년 이후 1995년에 이르기까지 비전<碑殿>과 홍살문·담장·어휘각 및 그밖의 각종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정비하고 단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격퇴시킨 사실을 기록한 승첩비<勝捷碑>가 서있던 옛터이다. 황산은 남원군 운봉면 동쪽에 자리잡은 해발 약 7백m의 바위산인데 이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전투사실과 이성계의 전공이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비석이 바로 황산대첩비였다. 이 비가 이루어진 것은 1577년(선조 10년)으로서 당시 왕명에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여성군 송인<礪城君 宋寅>이 글씨를 써서 운봉현감 박광옥<朴光玉>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비석이 파괴되어 일부의 파편만 남아 있던 것을 해방 후 그 자리에 복원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 대대적인 정화사업이 이루어져 새롭게 단장되었다. 황산대첩은 1380년(우왕 6년) 9월에 벌어진 전투로서 왜구의 주력부대가 지리산을 넘어 운봉의 인월역<引月驛>에 주둔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들은 성주지방을 공격한 후 계속 함양 부근까지 쳐들어와 아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어서 왜적들은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불태운 뒤 가까운 인월역에 머물면서 계속 북상 공격할 태세를 갖춤으로써 고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이미 해주지방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로,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림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당시 양측 군사들은 황산의 서북방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버팀으로써 아군으로서는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장<主將> 이성계의 용전<勇戰>과 과감한 작전지휘에 따라 총공격을 펼친 결과 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포함하여 무수한 왜구들을 사살함으로써 전사한 적병들의 피가 강물을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포획한 적의 말만도 1,600여필에 달하였으며, 적의 대군이 거의 전멸한 가운데 70여명만이 생존해 달아났을 만큼 큰 전승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격멸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였으니, 한국 전투사에서 크게 두드러진 쾌거로서 그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수록되었을 정도로 이름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비지<碑址>에는 비신이 오석<烏石>으로 복원된 높이 4.25m의 대첩비가 서 있는데, 이것은 용을 새긴 이수<이首>와 1.25m의 귀부<龜趺>를 갖추고 있다. 1972년에 신석호<申奭鎬>씨가 국문으로 황산대첩의 사적<事蹟>을 기술한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1973년 이후 1995년에 이르기까지 비전<碑殿>과 홍살문·담장·어휘각 및 그밖의 각종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정비하고 단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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