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산시 일동 555
이곳은 조선< 朝鮮 > 후기< 後期 > 실학< 實學 >의 대가 이익(1681∼1763) 선생의 묘이다. 선생의 자< 字 >는 자신< 自新 >, 호< 號 >는 성호< 星湖 >, 본관< 本貫 >은 여주< 驪州 >이다. 선생은 부친이 귀양가 있던 평북< 平北 > 운산< 雲山 >에서 출생하였으나 경기도< 京畿道 > 광주< 廣州 > 첨성리< 瞻星里 >에서 거주하였으므로 스스로 성호< 星湖 >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생의 부친는 당쟁의 와중에 귀양지에서 선생이 출생한 다음해에 별세하였고, 선생을 가르치던 형 이잠< 李潛 >마저 당쟁으로 희생되어 선생은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선생은 유형원< 柳馨遠 >의 학풍을 계승해서 천문< 天文 >, 지리< 地理 >, 의약< 醫藥 >, 율산< 律算 >, < 經史 > 등에 널리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 政治 >, 경제< 經濟 >, 지방제도< 地方制度 >, 과거제도< 科擧制度 >, 학제< 學制 >, 병제< 兵制 >, 관제< 官制 >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내용은 선생의 대표적 저술인 『성호사설< 星湖僿說 >』에 나타나 있다. 『곽우록< 藿憂錄 >』, 『성호문집< 星湖文集 >』 등 저술도 남겼다. 선생의 학문은 그후 안정복< 安鼎福 >, 이가환< 李家煥 >, 이중환< 李重煥 >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선생의 사후에 조정에서는 선생의 학덕을 기려 이조판서< 吏曹判書 >를 추증하였다.
이곳은 조선< 朝鮮 > 후기< 後期 > 실학< 實學 >의 대가 이익(1681∼1763) 선생의 묘이다. 선생의 자< 字 >는 자신< 自新 >, 호< 號 >는 성호< 星湖 >, 본관< 本貫 >은 여주< 驪州 >이다. 선생은 부친이 귀양가 있던 평북< 平北 > 운산< 雲山 >에서 출생하였으나 경기도< 京畿道 > 광주< 廣州 > 첨성리< 瞻星里 >에서 거주하였으므로 스스로 성호< 星湖 >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생의 부친는 당쟁의 와중에 귀양지에서 선생이 출생한 다음해에 별세하였고, 선생을 가르치던 형 이잠< 李潛 >마저 당쟁으로 희생되어 선생은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선생은 유형원< 柳馨遠 >의 학풍을 계승해서 천문< 天文 >, 지리< 地理 >, 의약< 醫藥 >, 율산< 律算 >, < 經史 > 등에 널리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 政治 >, 경제< 經濟 >, 지방제도< 地方制度 >, 과거제도< 科擧制度 >, 학제< 學制 >, 병제< 兵制 >, 관제< 官制 >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내용은 선생의 대표적 저술인 『성호사설< 星湖僿說 >』에 나타나 있다. 『곽우록< 藿憂錄 >』, 『성호문집< 星湖文集 >』 등 저술도 남겼다. 선생의 학문은 그후 안정복< 安鼎福 >, 이가환< 李家煥 >, 이중환< 李重煥 >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선생의 사후에 조정에서는 선생의 학덕을 기려 이조판서< 吏曹判書 >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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