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석왕동 산55
이 능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약 150m 사이를 두고 자리하고 있어서 쌍릉이라 부른다. 그 중 북쪽(입구쪽)에 있는 큰 무덤은 '대왕릉'으로 불리는 '말통대왕릉'이며, 남쪽에 있는 규모가 작은 능은 '소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말통(末通)'은 서동의 이름인 마동(麻童)이 잘못 전하여진 것이라 한다. 최근에 석상(石床), 장명등(長明燈), 석수(石獸) 등을 봉토 앞쪽에 설치하였다.
이 무덤은 고려 충숙왕 14년(1326) 왜구의 노략질로 인하여 여러차례 도굴되었는데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谷井濟一)에 의하여 발굴 조사 보고 되었다.
대왕묘는 지름 30m, 높이 5m 정도, 소왕묘는 지름 24m, 높이 2.5m 정도의 원형분으로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부여 능산리 고분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橫穴式石官墳)과 같은 형식의 판석제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현실)은 장방형이며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벽을 세웠다. 널방 중앙에는 관대가 있었고 그 위에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조사된 사실로 미루어 사발형 토기 1점을 제외하고는 유물을 모두 도난 당하였으나 나무널은 복원하여 국립전주박물관에 토기와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와같은 무덤은 백제에 있어서 7세기 전반기에 나타나는 무덤양식으로 백제 무왕의 미륵사지의 창건이나 왕궁 평성의 조성과 관련지어 본다면 백제 무왕과 그 부인인 선화비의 무덤일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이 능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약 150m 사이를 두고 자리하고 있어서 쌍릉이라 부른다. 그 중 북쪽(입구쪽)에 있는 큰 무덤은 '대왕릉'으로 불리는 '말통대왕릉'이며, 남쪽에 있는 규모가 작은 능은 '소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말통(末通)'은 서동의 이름인 마동(麻童)이 잘못 전하여진 것이라 한다. 최근에 석상(石床), 장명등(長明燈), 석수(石獸) 등을 봉토 앞쪽에 설치하였다.
이 무덤은 고려 충숙왕 14년(1326) 왜구의 노략질로 인하여 여러차례 도굴되었는데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谷井濟一)에 의하여 발굴 조사 보고 되었다.
대왕묘는 지름 30m, 높이 5m 정도, 소왕묘는 지름 24m, 높이 2.5m 정도의 원형분으로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부여 능산리 고분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橫穴式石官墳)과 같은 형식의 판석제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현실)은 장방형이며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벽을 세웠다. 널방 중앙에는 관대가 있었고 그 위에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조사된 사실로 미루어 사발형 토기 1점을 제외하고는 유물을 모두 도난 당하였으나 나무널은 복원하여 국립전주박물관에 토기와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와같은 무덤은 백제에 있어서 7세기 전반기에 나타나는 무덤양식으로 백제 무왕의 미륵사지의 창건이나 왕궁 평성의 조성과 관련지어 본다면 백제 무왕과 그 부인인 선화비의 무덤일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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