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 산1-14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의 문신, 학자인 서성(1558∼1631)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의 자< 字 >는 현기< 玄紀 >, 호< 號 >는 약봉< 藥峰 >, 시호< 諡號 >는 층숙< 忠肅 >이며, 본관< 本貫 >은 달성< 達城 >이다. 선조< 宣祖 > 19년(1586) 29세 때 별시< 別試 > 문과< 文科 >에 급제, 병조좌랑< 兵曹佐郎 >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 義州 >까지 모시었다. 그후 경상< 慶尙 >, 강원< 江原 >, 함경< 咸鏡 >, 평안< 平安 >, 경기< 京畿 > 각도의 관찰사< 觀察使 >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光海君 > 5년(1613) 영창대군< 永昌大君 > 문제에 연루되어 11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 仁祖反正 > 후 다시 형조< 刑曹 >, 병조판서< 兵曹判書 >가 되었고, 이괄< 李适 >의 난과 정묘호란< 丁卯胡亂 > 때 왕을 모시고 좇았다. 역학< 易學 >, 서화< 書畵 >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후에 영의정< 領議政 >에 추증< 追贈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 이씨< 李氏 >는 소경으로 일찌기 남편을 잃고, 약현< 藥峴 >이란 곳에 살면서 술과 약과를 팔아 아들을 공부시켰으며, 오늘의 약주< 藥酒 >, 약과< 藥果 >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여, 서성의 호를 약봉이라 한 것도 약현이라는 지명에서 떼어다 붙인 것이라고 전한다. 묘비< 墓碑 >와 석인< 石人 >이 있고 곡담< 曲垣 >을 갖추었다.
조선< 朝鮮 > 중기< 中期 >의 문신, 학자인 서성(1558∼1631) 선생의 묘소이다. 선생의 자< 字 >는 현기< 玄紀 >, 호< 號 >는 약봉< 藥峰 >, 시호< 諡號 >는 층숙< 忠肅 >이며, 본관< 本貫 >은 달성< 達城 >이다. 선조< 宣祖 > 19년(1586) 29세 때 별시< 別試 > 문과< 文科 >에 급제, 병조좌랑< 兵曹佐郎 >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 義州 >까지 모시었다. 그후 경상< 慶尙 >, 강원< 江原 >, 함경< 咸鏡 >, 평안< 平安 >, 경기< 京畿 > 각도의 관찰사< 觀察使 >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光海君 > 5년(1613) 영창대군< 永昌大君 > 문제에 연루되어 11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 仁祖反正 > 후 다시 형조< 刑曹 >, 병조판서< 兵曹判書 >가 되었고, 이괄< 李适 >의 난과 정묘호란< 丁卯胡亂 > 때 왕을 모시고 좇았다. 역학< 易學 >, 서화< 書畵 >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후에 영의정< 領議政 >에 추증< 追贈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 이씨< 李氏 >는 소경으로 일찌기 남편을 잃고, 약현< 藥峴 >이란 곳에 살면서 술과 약과를 팔아 아들을 공부시켰으며, 오늘의 약주< 藥酒 >, 약과< 藥果 >라는 이름도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여, 서성의 호를 약봉이라 한 것도 약현이라는 지명에서 떼어다 붙인 것이라고 전한다. 묘비< 墓碑 >와 석인< 石人 >이 있고 곡담< 曲垣 >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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