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산8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의병장 이덕남(?~1592) 장군의 묘소이다. 장군은 안성<安城>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말타고 활쏘기의 명수로서 20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임명되었고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안성에서 외삼촌 홍자수<洪自修>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농기구를 녹여 만든 무기로 북진하는 왜적을 수차에 걸쳐 격퇴하였다. 그 뒤 용인<龍仁>, 죽산<竹山>, 양지<陽智>에 진을 구축하는 동시에 서운산성<瑞雲山城>에 토성<土城>을 쌓아 기호<畿湖>, 호서<湖西>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침공하는 왜적을 용감히 무찌르다 전사하였다. 묘소 앞에 있는 묘비의 비문은 영조<英祖> 때 학자 윤봉구가 지었고 문신 홍봉조가 쓴 것을 김상진이 각자<刻字>하여 세웠다. 숙종<肅宗> 44년(1718)에는 장군의 생가에(서운면) 정문<旌門>을 세우고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追贈>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의병장 이덕남(?~1592) 장군의 묘소이다. 장군은 안성<安城>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말타고 활쏘기의 명수로서 20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으로 임명되었고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안성에서 외삼촌 홍자수<洪自修>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농기구를 녹여 만든 무기로 북진하는 왜적을 수차에 걸쳐 격퇴하였다. 그 뒤 용인<龍仁>, 죽산<竹山>, 양지<陽智>에 진을 구축하는 동시에 서운산성<瑞雲山城>에 토성<土城>을 쌓아 기호<畿湖>, 호서<湖西>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침공하는 왜적을 용감히 무찌르다 전사하였다. 묘소 앞에 있는 묘비의 비문은 영조<英祖> 때 학자 윤봉구가 지었고 문신 홍봉조가 쓴 것을 김상진이 각자<刻字>하여 세웠다. 숙종<肅宗> 44년(1718)에는 장군의 생가에(서운면) 정문<旌門>을 세우고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追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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