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산4
선조< 宣祖 > 때의 정승인 이항복(1556∼1618)의 묘이다. 선생의 자< 字 >는 자상< 子常 >, 호< 號 >는 필운< 弼雲 > 또는 백사< 白沙 >이며 본관< 本貫 >은 경주< 慶州 >로 고려< 高麗 > 말기< 末期 > 대학자 이제현< 李齊賢 >의 후손이며 시호< 諡號 >는 문충< 文忠 >이다.
선조< 宣祖 > 때의 정승인 이항복(1556∼1618)의 묘이다. 선생의 자< 字 >는 자상< 子常 >, 호< 號 >는 필운< 弼雲 > 또는 백사< 白沙 >이며 본관< 本貫 >은 경주< 慶州 >로 고려< 高麗 > 말기< 末期 > 대학자 이제현< 李齊賢 >의 후손이며 시호< 諡號 >는 문충< 文忠 >이다.
선조 13년(1580) 문과< 文科 >에 급제, 정여립< 鄭汝立 >의 모반< 謀反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平難功臣 >의 호를 받았으며, 1592년 임진왜란< 壬辰倭亂 > 때 도승지< 都承旨 >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갔으며, 이조참판< 吏曹參判 >으로 오성군< 鰲城君 >에 봉< 封 >해졌다. 그후 대사헌을 거쳐 병조판서< 兵曹判書 >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이래 전후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선조 31년(1598) 우의정< 右議政 >이 되고 다시 영의정< 領議政 >에 승진하여 오성부원군< 鰲城府院君 >에 봉해지고 공 1등이 되었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 永昌大君 >을 구원하려고 힘썼고, 폐모< 廢母 >(인목대비< 仁穆大妃 >) 논의에 적극 반대하다 북청< 北靑 >에 귀양가서 죽었으며 이곳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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