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80
이 석탑은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왕궁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 약 8.5m.
조선시대 말기에 출판된 익산읍지인 「금마지(金馬誌)」에 '王宮塔在宮墟前 高十丈累石宛然 俗傳馬韓時所造'(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이 되는 완전한 것이었다. 속전에 의하면 마한시대에 만든 것이다.) 라는 간단한 문헌자료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1965년 해체 복원되기 전까지만 해도 토단(土壇)을 갖춘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진 것이었으나 해체발굴에 의하여 이 탑은 원래 돌로 만든 기단(基壇)을 구비하였던 것임을 밝히게 되어 원형으로 복원하였다.
이때 밝혀진 기단의 구조는 적심(積心)으로 벽의 안쪽을 돌로 쌓아 조영한 것이 아니라 목조탑의 경우와 같이 네 귀에는 부등변(不等邊) 팔각의 높은 기둥을 주춧돌 위에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장대석(長臺石)을 창방(昌枋)과 평방(坪枋)식으로 올려 놓았다. 이 평방 위에 초층탑신이 놓이게 되고 아울러 기단갑석(基壇甲石)을 받도록 결가(結架)되어 있다.
네 기둥이 세워져 있는 중심에 해당되는 중앙에는 큼직한 심초석(心礎石)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 목조탑에서나 볼 수 있는 심주(心柱)에 해당되는 여러 단의 방형석재를 쌓아 올렸다. 팔각기둥과 방형석재는 모두 목재건축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과 돌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공간에는 잡석과 흙을 다져 메웠는데 흙 속에서 백제시대 기와파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기단에 해당되는 곳에서 갑석과 깨어진 면석들이 발견되었는데 각 면에는 두 개의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었다.
해체 보수 중 탑의 제1층 옥개석 중앙과 심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옥개석에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석재는 백제시대 초석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이용하였으며 좌우 두곳에 4각형의 홈(凹)을 만들고 뚜껑이 있는 금동제함(有蓄金銅函, 금으로 만든 뚜껑있는 네모꼴의 함)이 들어 있었으며 그 속에 다시 금제연화대좌(金製蓮花臺座)를 갖추고 연꽃형 뚜껑을 갖춘 녹색유리로 만든 사리병인 장경원저병(長徑圓底甁)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쪽 역시 금으로 된 뚜껑있는 네모꼴의 함 안에서 순금으로 금강경판(金剛經版)이 발견되었다.
기단부의 심초석에 설치된 사리공은 품(品)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주형광배(舟形光背)를 갖춘 청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靑銅鈴)이 들어 있었고 북쪽 구멍에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 당하였다.
이들 순금제 금강경판 등의 사리 장치는 국보 123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 사리장치는 「관세음응험기」의 제석사지 화재기록에서 나오는 사리장치들과 내용이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탑의 외부구조를 살펴보면, 두 탱주를 갖춘 기단면석위에 갑석을 놓고 5층 탑신을 올렸는데, 1층 탑신에는 우주를 각출한 주형(柱形)의 4우석(四隅石)과 탱주가 조각된 중간면석으로 된 8장의 병풍돌로 짜여졌으며 2층은 사면 1개의 돌, 3층 이상은 2매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우주석을 조각하였다.
추녀는 얇고 밑은 수평이나 우각(隅角)에서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여주는 곳에 밑으로 풍령공(風鈴孔)이 뚫려 있다.
지붕들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도 경미한데 옥신을 받치기 위하여 다른 돌을 끼워 놓았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그리고 부서진 보륜(寶輪) 1개가 남아있다.
이 석탑에 대해서는 그 조성연대에 대한 의견이 옥개양식에서 백제계를 따르고, 탑신부의 돌 결구 수법과 층급받침 수법에서 통일신라 초기의 설 등이 대립되어 주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 결과 탑의 하부(下部)에서 다져 쌓기로 조성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어 석탑의 조성연대는 백제시대보다 다소 늦은 시대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석탑은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왕궁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 약 8.5m.
조선시대 말기에 출판된 익산읍지인 「금마지(金馬誌)」에 '王宮塔在宮墟前 高十丈累石宛然 俗傳馬韓時所造'(왕궁탑은 폐허가 된 궁터 앞에 높이 10장이 되는 완전한 것이었다. 속전에 의하면 마한시대에 만든 것이다.) 라는 간단한 문헌자료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1965년 해체 복원되기 전까지만 해도 토단(土壇)을 갖춘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진 것이었으나 해체발굴에 의하여 이 탑은 원래 돌로 만든 기단(基壇)을 구비하였던 것임을 밝히게 되어 원형으로 복원하였다.
이때 밝혀진 기단의 구조는 적심(積心)으로 벽의 안쪽을 돌로 쌓아 조영한 것이 아니라 목조탑의 경우와 같이 네 귀에는 부등변(不等邊) 팔각의 높은 기둥을 주춧돌 위에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장대석(長臺石)을 창방(昌枋)과 평방(坪枋)식으로 올려 놓았다. 이 평방 위에 초층탑신이 놓이게 되고 아울러 기단갑석(基壇甲石)을 받도록 결가(結架)되어 있다.
네 기둥이 세워져 있는 중심에 해당되는 중앙에는 큼직한 심초석(心礎石)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 목조탑에서나 볼 수 있는 심주(心柱)에 해당되는 여러 단의 방형석재를 쌓아 올렸다. 팔각기둥과 방형석재는 모두 목재건축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과 돌기둥을 사용하였으며, 공간에는 잡석과 흙을 다져 메웠는데 흙 속에서 백제시대 기와파편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기단에 해당되는 곳에서 갑석과 깨어진 면석들이 발견되었는데 각 면에는 두 개의 탱주(撑柱)가 새겨져 있었다.
해체 보수 중 탑의 제1층 옥개석 중앙과 심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옥개석에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석재는 백제시대 초석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이용하였으며 좌우 두곳에 4각형의 홈(凹)을 만들고 뚜껑이 있는 금동제함(有蓄金銅函, 금으로 만든 뚜껑있는 네모꼴의 함)이 들어 있었으며 그 속에 다시 금제연화대좌(金製蓮花臺座)를 갖추고 연꽃형 뚜껑을 갖춘 녹색유리로 만든 사리병인 장경원저병(長徑圓底甁)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쪽 역시 금으로 된 뚜껑있는 네모꼴의 함 안에서 순금으로 금강경판(金剛經版)이 발견되었다.
기단부의 심초석에 설치된 사리공은 품(品)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는 주형광배(舟形光背)를 갖춘 청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靑銅鈴)이 들어 있었고 북쪽 구멍에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 당하였다.
이들 순금제 금강경판 등의 사리 장치는 국보 123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 사리장치는 「관세음응험기」의 제석사지 화재기록에서 나오는 사리장치들과 내용이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탑의 외부구조를 살펴보면, 두 탱주를 갖춘 기단면석위에 갑석을 놓고 5층 탑신을 올렸는데, 1층 탑신에는 우주를 각출한 주형(柱形)의 4우석(四隅石)과 탱주가 조각된 중간면석으로 된 8장의 병풍돌로 짜여졌으며 2층은 사면 1개의 돌, 3층 이상은 2매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우주석을 조각하였다.
추녀는 얇고 밑은 수평이나 우각(隅角)에서 가벼운 반전(反轉)을 보여주는 곳에 밑으로 풍령공(風鈴孔)이 뚫려 있다.
지붕들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도 경미한데 옥신을 받치기 위하여 다른 돌을 끼워 놓았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그리고 부서진 보륜(寶輪) 1개가 남아있다.
이 석탑에 대해서는 그 조성연대에 대한 의견이 옥개양식에서 백제계를 따르고, 탑신부의 돌 결구 수법과 층급받침 수법에서 통일신라 초기의 설 등이 대립되어 주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굴 결과 탑의 하부(下部)에서 다져 쌓기로 조성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어 석탑의 조성연대는 백제시대보다 다소 늦은 시대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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