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주시 남면 매곡리 282
집 뒤 매봉재를 진산< 鎭山 >으로 삼고 그 줄기가 좌우< 左右 >로 돌아 청룡백호< 靑龍白虎 >를 이룬다. 집 앞은 너른 들이 펼쳐지고 멀리 낮은 토성형상< 土城形象 >의 산이 둘렀으며 그 너머로 도랍산이 조공< 朝貢 >하고 있다. 동구< 洞口 >에는 조그만 냇물이 흐르는데 안산< 案山 >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냇가를 따라 회나무를 심어 정취< 情趣 >를 돋운다.
평면은 전체적으로 ㅁ자< 字 > 모양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사랑채와 별당채는 지대석< 址臺石 >만 남긴 채 헐리고 없으며 튼ㅁ자< 字 > 모양인 살림채만 남아있다. 외부공간< 外部空間 >은 행랑채앞의 사랑마당, 집안의 안마당, 안채뒤의 뒤뜰로 이루어졌다. 살림채는 ㄴ자형< 字形 >의 행랑채와 꼬리가 달린 ㄱ자형< 字形 >의 안채로 구성< 構成 >되었다. 안채는 일반적인 ㄱ자형< 字形 >집과 같아서 부엌, 안방을 세로로 두고 꺾어져서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치하였는데 부엌 뒤(가로)로 광과 뒷방을 곁달고 있다. 이와 같은 평면구성은 사대부< 士大夫 >집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보간은 모두 간반< 間半 >으로 했는데 다만 뒷방쪽만 단간< 單間 > 크기로 만들었다. 도리간은 부엌, 안방, 대청이 2간< 間 > 길이이고 기타는 단간< 單間 >이다. 행랑채는 사대부< 士大夫 >집답게 대단히 길게 만들어져서 안채 전체를 감싸고 있다. 서쪽 아래로부터 부엌, 아래·위문간방, 광, 대문간, 마구간, 구들이 배치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2간< 間 >부엌, 2간< 間 >뜰아랫방, 고방< 庫房 >(쌀광), 2간< 間 >광의 순서로 놓였다. 모두 안마당으로 동선이 연결되는데 전면구들들은 안쪽으로 문을 내었다. 안채의 구조< 構造 >는 가로, 세로 모두 1고주5량이며 대청 중앙은 긴보5량으로 처리했다. 물론 뒷방(채)쪽은 맞걸이3량이다. 대청의 앞 중도리 아래에는 기둥과 비슷한 벽선을 세워서 1고주5량처럼 만들고 여기에 분합문< 分閤門 >을 설치< 設置 >했다. 이것은 19세기< 世紀 > 후반기< 後半期 >에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지대석< 址臺石 >은 두벌대로서 화강암< 花崗巖 >을 잘 다듬어 곱게 배열했고 높은 주초이다. 기둥은 네모꼴인데 실오리모로 접었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격식에 맞춰 잘 다듬었으며 장혀는 없다. 다만 종도리에만 작은 장혀를 받치고 소로를 끼워 헛창방을 보냈다. 대공은 사다리꼴이며 보는 둥근 네모꼴이다. 지붕은 합각으로서 한식기와를 얹었다. 부엌 웃간 상부< 上部 >에는 다락을 시설했는데 그 앞에 만들어진 선반은 당초 무늬가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까치발로 받치고 있어서 인상깊다. 행랑채의 구조는 맞걸이3량이며 기와지붕 맞배집이다.
전체적< 全體的 >으로 건축기법< 建築技法 >은 조선조< 朝鮮朝 > 말< 末 >의 기법< 技法 >을 따르고 있으나 매우 정교< 精巧 >하게 건축되었다. 행랑채 앞의 사랑마당은 원형< 原形 >이 많이 파괴되어서 정원< 庭園 >다운 것은 남아 있지 않으며 안마당에도 별다른 정원시설물은 없다. 그러나 안방 서쪽에 마련되는 뒤뜰에는 우물과 전나무, 잣나무, 앵두나무, 복숭아등을 심고 집뒤로는 화강암 장대석을 한벌 돌려서 나무를 식재< 植栽 >하여 정원< 庭園 >을 꾸미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행랑채 용마루 망와에 1682년< 年 >(강희< 康熙 >21년< 年 >)이라는 명기< 銘記 >가 있으나 실제의 건축년대는 건축기법< 建築技法 >으로 미루어 볼 때 훨씬 뒤인 19세기말< 世紀末 > 정도로 추정< 推定 >된다. 강희년간< 康熙年間 >의 망와는 경기·충청지방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아마 당시까지는 제작년대< 製作年代 >를 기록했으며 그때 기와를 계속해서 새집에 옮겨 올렸을 것으로 추측< 推測 >된다. 다른 집의 명기< 銘記 > 있는 망와를 보면 이후에 제작했던 기와인데 거푸집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또 어떤 것은 옛 것을 그대로 글자까지 모사< 模寫 >하여 구운 것도 있다. 따라서 이 집은 조선조말< 朝鮮朝末 > 민비< 閔妃 >의 피난처< 避難處 >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었다는 전언< 傳言 >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집 뒤 매봉재를 진산< 鎭山 >으로 삼고 그 줄기가 좌우< 左右 >로 돌아 청룡백호< 靑龍白虎 >를 이룬다. 집 앞은 너른 들이 펼쳐지고 멀리 낮은 토성형상< 土城形象 >의 산이 둘렀으며 그 너머로 도랍산이 조공< 朝貢 >하고 있다. 동구< 洞口 >에는 조그만 냇물이 흐르는데 안산< 案山 >이 마땅치 않았으므로 냇가를 따라 회나무를 심어 정취< 情趣 >를 돋운다.
평면은 전체적으로 ㅁ자< 字 > 모양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사랑채와 별당채는 지대석< 址臺石 >만 남긴 채 헐리고 없으며 튼ㅁ자< 字 > 모양인 살림채만 남아있다. 외부공간< 外部空間 >은 행랑채앞의 사랑마당, 집안의 안마당, 안채뒤의 뒤뜰로 이루어졌다. 살림채는 ㄴ자형< 字形 >의 행랑채와 꼬리가 달린 ㄱ자형< 字形 >의 안채로 구성< 構成 >되었다. 안채는 일반적인 ㄱ자형< 字形 >집과 같아서 부엌, 안방을 세로로 두고 꺾어져서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치하였는데 부엌 뒤(가로)로 광과 뒷방을 곁달고 있다. 이와 같은 평면구성은 사대부< 士大夫 >집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보간은 모두 간반< 間半 >으로 했는데 다만 뒷방쪽만 단간< 單間 > 크기로 만들었다. 도리간은 부엌, 안방, 대청이 2간< 間 > 길이이고 기타는 단간< 單間 >이다. 행랑채는 사대부< 士大夫 >집답게 대단히 길게 만들어져서 안채 전체를 감싸고 있다. 서쪽 아래로부터 부엌, 아래·위문간방, 광, 대문간, 마구간, 구들이 배치되고 북쪽으로 꺾어져서 2간< 間 >부엌, 2간< 間 >뜰아랫방, 고방< 庫房 >(쌀광), 2간< 間 >광의 순서로 놓였다. 모두 안마당으로 동선이 연결되는데 전면구들들은 안쪽으로 문을 내었다. 안채의 구조< 構造 >는 가로, 세로 모두 1고주5량이며 대청 중앙은 긴보5량으로 처리했다. 물론 뒷방(채)쪽은 맞걸이3량이다. 대청의 앞 중도리 아래에는 기둥과 비슷한 벽선을 세워서 1고주5량처럼 만들고 여기에 분합문< 分閤門 >을 설치< 設置 >했다. 이것은 19세기< 世紀 > 후반기< 後半期 >에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지대석< 址臺石 >은 두벌대로서 화강암< 花崗巖 >을 잘 다듬어 곱게 배열했고 높은 주초이다. 기둥은 네모꼴인데 실오리모로 접었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격식에 맞춰 잘 다듬었으며 장혀는 없다. 다만 종도리에만 작은 장혀를 받치고 소로를 끼워 헛창방을 보냈다. 대공은 사다리꼴이며 보는 둥근 네모꼴이다. 지붕은 합각으로서 한식기와를 얹었다. 부엌 웃간 상부< 上部 >에는 다락을 시설했는데 그 앞에 만들어진 선반은 당초 무늬가 아름답게 아로새겨진 까치발로 받치고 있어서 인상깊다. 행랑채의 구조는 맞걸이3량이며 기와지붕 맞배집이다.
전체적< 全體的 >으로 건축기법< 建築技法 >은 조선조< 朝鮮朝 > 말< 末 >의 기법< 技法 >을 따르고 있으나 매우 정교< 精巧 >하게 건축되었다. 행랑채 앞의 사랑마당은 원형< 原形 >이 많이 파괴되어서 정원< 庭園 >다운 것은 남아 있지 않으며 안마당에도 별다른 정원시설물은 없다. 그러나 안방 서쪽에 마련되는 뒤뜰에는 우물과 전나무, 잣나무, 앵두나무, 복숭아등을 심고 집뒤로는 화강암 장대석을 한벌 돌려서 나무를 식재< 植栽 >하여 정원< 庭園 >을 꾸미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행랑채 용마루 망와에 1682년< 年 >(강희< 康熙 >21년< 年 >)이라는 명기< 銘記 >가 있으나 실제의 건축년대는 건축기법< 建築技法 >으로 미루어 볼 때 훨씬 뒤인 19세기말< 世紀末 > 정도로 추정< 推定 >된다. 강희년간< 康熙年間 >의 망와는 경기·충청지방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아마 당시까지는 제작년대< 製作年代 >를 기록했으며 그때 기와를 계속해서 새집에 옮겨 올렸을 것으로 추측< 推測 >된다. 다른 집의 명기< 銘記 > 있는 망와를 보면 이후에 제작했던 기와인데 거푸집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또 어떤 것은 옛 것을 그대로 글자까지 모사< 模寫 >하여 구운 것도 있다. 따라서 이 집은 조선조말< 朝鮮朝末 > 민비< 閔妃 >의 피난처< 避難處 >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었다는 전언< 傳言 >이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