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이천시 율면 산성1∼2리 74
돌안마을 깊숙이 아주 큰 소나무숲을 뒤로하고 널찍이 띠엄띠엄 자리하고 있다. 사방으로 개방< 開放 >된 바깥마당이 집 앞에 배치< 配置 >되며 동남< 東南 >쪽 앞에서 진입< 進入 >하도록 되어있다. 일자형< 一字形 > 사랑채가 바깥마당에 면하여 앉고 사랑채 뒤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형< 字形 >인 안채가 집안의 중심에 위치하며 안마당 동쪽으로 광채가 자리해서 전체적으로 □자< 字 > 모양을 이룬다. 안대문은 광채의 한쪽을 이용해서 동선을 꺾어 안마당으로 진입하게 된다. 광채 뒷모서리에서 뒤로 큼지막하게 토담을 돌려서 집안을 둘러싸고 뒤안 공간을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여유< 餘裕 >있게 집들을 배치< 配置 >하고 있다. 안채는 7간< 間 > ㄱ자형< 字形 >집인데 양반가옥 답지 않게 퇴없이 맞걸이3량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평면구성은 특징없이 평이< 平易 >하게 되어서 왼쪽에 부엌과 안방, 그리고 꺾어져서 대청, 건넌방 순으로 배치된다. 부엌과 안방, 대청은 모두 2간< 間 >인데 부엌광이나 골방은 따로 두지 않았다. 부엌에는 벽장과 다락을 뒤쪽 간에만 시설하고 앞쪽 간에는 반간쯤 나뭇간을 만들었다. 안방 뒷벽은 헛기둥을 세워서 반침을 달아 내었고 대청 웃간에는 뒷벽에 벽장을 시설했다.
구조는 맞걸이3량인데 네모기둥에 납도리집으로 장혀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부엌 상부의 지붕틀을 보면 종도리에 맞춰 우미량을 처마도리까지 걸친 다음 그위에 떡받침을 올려놓고 추녀 머리를 얽었다. 지붕은 초가집인데 거의 박공집에 가깝다. 사랑채는 4간< 間 >전후퇴의 우진각 초가지붕집이다. 평면은 서쪽으로부터 부엌, 2간< 間 >구들, 대청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후퇴는 나중에 덧달아 낸 것으로써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 推測 >된다. 앞퇴에는 구들과 대청< 大廳 > 앞에만 조그만 쪽마루가 시설되었고 뒷퇴에는 구들문 사이에만 쪽마루가 놓였다. 부엌 상부에는 다락이 시설되었고 대청< 大廳 >은 안마당 쪽은 막고 바깥마당과 동쪽벽은 틔워 놓았다. 앞퇴는 부엌 앞은 아예 만들지 않았으며 뒷퇴는 양쪽 측벽을 막았다. 사랑부엌은 안마당에서만 출입토록 되어있다. 구조는 원래 3량집이었으나 앞뒤로 다시 평주< 平柱 >를 세우고 퇴를 덧달아 내었다. 앞퇴는 퇴보없이 토막보만을 기둥머리에 맞추고 서까래는 거의 수평으로 걸쳐서 처리했다. 앞 평주< 平柱 >는 사랑채 댓돌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오히려 내진주 보다 기둥높이가 길다. 앞 평주< 平柱 > 앞에는 다시 높은(4자)기단< 基壇 >이 만들어져서 결국 2단< 段 >의 기단< 基壇 >이 조성< 造成 >된 셈이다. 뒷퇴는 퇴보를 기둥머리에 끼워 맞췄다. 그러나 기둥높이는 거의 같으며 상투맞춤으로 결구< 結構 >했다. 뒤의 댓돌은 자연석< 自然石 > 두벌로 낮다. 네모기둥이고 납도리이며 역시 장혀는 받치지 않았다. 그러나 뒷퇴의 처마도리는 굴도리이다. (20세기< 世紀 > 중반쯤 추측< 推測 >) 측면< 側面 >의 지붕틀은 앞뒤의 중도리 우에 대들보를 걸쳐대고 중앙에 동자주를 세운 다음 머리에 종도리와 토막보를 십자< 十字 > 맞춤하여 추녀머리를 걸쳤다. 여기에 말굽서까래를 나열해서 지붕틀을 형성했다. 기둥은 약간의 귀를 죽였으며 도리 역시 면을 잡고 있다. 광채는 우진각 초가지붕으로서 3평주5량인 양통집의 평면구성을 보인다. 평면구성은 4간< 間 >×2간< 間 > 크기로서 안마당쪽에서 볼 때 북쪽 2간< 間 >×2간< 間 >은 광으로 쓰고 다음은 앞에 고방(고방< 庫房 >·마루광), 뒤에 부엌을 두며 맨끝은 앞에 대문간< 大門間 >, 뒤에 구들을 배치했다. 부엌 상부에는 선반이 매어져 있으며 밖에서 출입하도록 했다. 대문< 大門 >은 남쪽 측면에 설치되며 안마당쪽 벽을 터서 ㄱ자< 字 >로 꺾어져 안마당에 진입< 進入 >한다. 대신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나지막한 돌담을 고방< 庫房 >과의 사이에 1간< 間 > 정도 연결해 두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은 높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대문 앞 지대석< 址臺石 >에 몇 개의 자연석계단< 自然石階段 >을 만들어서 해결했다.
이 집은 신미양요< 辛未洋擾 > 당시 전사< 戰死 >한 어재연< 魚在淵 > 장군< 將軍 >의 생가< 生家 >라고 전하므로 19세기< 世紀 > 초< 初 >의 건물< 建物 >로 추정< 推定 >된다. 안채, 사랑채, 광채 모두가 원형< 原形 >의 변형< 變形 >없이 비교적 잘 보존< 保存 >되었고 건물의 질도 우수하다. 그러나 광채는 훨씬 연대가 떨어지는 20세기< 世紀 > 초< 初 > 건물로 여겨지며 사랑채 역시 이때 개축< 改築 >한 것으로 보인다.
돌안마을 깊숙이 아주 큰 소나무숲을 뒤로하고 널찍이 띠엄띠엄 자리하고 있다. 사방으로 개방< 開放 >된 바깥마당이 집 앞에 배치< 配置 >되며 동남< 東南 >쪽 앞에서 진입< 進入 >하도록 되어있다. 일자형< 一字形 > 사랑채가 바깥마당에 면하여 앉고 사랑채 뒤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형< 字形 >인 안채가 집안의 중심에 위치하며 안마당 동쪽으로 광채가 자리해서 전체적으로 □자< 字 > 모양을 이룬다. 안대문은 광채의 한쪽을 이용해서 동선을 꺾어 안마당으로 진입하게 된다. 광채 뒷모서리에서 뒤로 큼지막하게 토담을 돌려서 집안을 둘러싸고 뒤안 공간을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여유< 餘裕 >있게 집들을 배치< 配置 >하고 있다. 안채는 7간< 間 > ㄱ자형< 字形 >집인데 양반가옥 답지 않게 퇴없이 맞걸이3량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평면구성은 특징없이 평이< 平易 >하게 되어서 왼쪽에 부엌과 안방, 그리고 꺾어져서 대청, 건넌방 순으로 배치된다. 부엌과 안방, 대청은 모두 2간< 間 >인데 부엌광이나 골방은 따로 두지 않았다. 부엌에는 벽장과 다락을 뒤쪽 간에만 시설하고 앞쪽 간에는 반간쯤 나뭇간을 만들었다. 안방 뒷벽은 헛기둥을 세워서 반침을 달아 내었고 대청 웃간에는 뒷벽에 벽장을 시설했다.
구조는 맞걸이3량인데 네모기둥에 납도리집으로 장혀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부엌 상부의 지붕틀을 보면 종도리에 맞춰 우미량을 처마도리까지 걸친 다음 그위에 떡받침을 올려놓고 추녀 머리를 얽었다. 지붕은 초가집인데 거의 박공집에 가깝다. 사랑채는 4간< 間 >전후퇴의 우진각 초가지붕집이다. 평면은 서쪽으로부터 부엌, 2간< 間 >구들, 대청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후퇴는 나중에 덧달아 낸 것으로써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 推測 >된다. 앞퇴에는 구들과 대청< 大廳 > 앞에만 조그만 쪽마루가 시설되었고 뒷퇴에는 구들문 사이에만 쪽마루가 놓였다. 부엌 상부에는 다락이 시설되었고 대청< 大廳 >은 안마당 쪽은 막고 바깥마당과 동쪽벽은 틔워 놓았다. 앞퇴는 부엌 앞은 아예 만들지 않았으며 뒷퇴는 양쪽 측벽을 막았다. 사랑부엌은 안마당에서만 출입토록 되어있다. 구조는 원래 3량집이었으나 앞뒤로 다시 평주< 平柱 >를 세우고 퇴를 덧달아 내었다. 앞퇴는 퇴보없이 토막보만을 기둥머리에 맞추고 서까래는 거의 수평으로 걸쳐서 처리했다. 앞 평주< 平柱 >는 사랑채 댓돌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오히려 내진주 보다 기둥높이가 길다. 앞 평주< 平柱 > 앞에는 다시 높은(4자)기단< 基壇 >이 만들어져서 결국 2단< 段 >의 기단< 基壇 >이 조성< 造成 >된 셈이다. 뒷퇴는 퇴보를 기둥머리에 끼워 맞췄다. 그러나 기둥높이는 거의 같으며 상투맞춤으로 결구< 結構 >했다. 뒤의 댓돌은 자연석< 自然石 > 두벌로 낮다. 네모기둥이고 납도리이며 역시 장혀는 받치지 않았다. 그러나 뒷퇴의 처마도리는 굴도리이다. (20세기< 世紀 > 중반쯤 추측< 推測 >) 측면< 側面 >의 지붕틀은 앞뒤의 중도리 우에 대들보를 걸쳐대고 중앙에 동자주를 세운 다음 머리에 종도리와 토막보를 십자< 十字 > 맞춤하여 추녀머리를 걸쳤다. 여기에 말굽서까래를 나열해서 지붕틀을 형성했다. 기둥은 약간의 귀를 죽였으며 도리 역시 면을 잡고 있다. 광채는 우진각 초가지붕으로서 3평주5량인 양통집의 평면구성을 보인다. 평면구성은 4간< 間 >×2간< 間 > 크기로서 안마당쪽에서 볼 때 북쪽 2간< 間 >×2간< 間 >은 광으로 쓰고 다음은 앞에 고방(고방< 庫房 >·마루광), 뒤에 부엌을 두며 맨끝은 앞에 대문간< 大門間 >, 뒤에 구들을 배치했다. 부엌 상부에는 선반이 매어져 있으며 밖에서 출입하도록 했다. 대문< 大門 >은 남쪽 측면에 설치되며 안마당쪽 벽을 터서 ㄱ자< 字 >로 꺾어져 안마당에 진입< 進入 >한다. 대신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나지막한 돌담을 고방< 庫房 >과의 사이에 1간< 間 > 정도 연결해 두었다. 안마당과 바깥마당은 높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대문 앞 지대석< 址臺石 >에 몇 개의 자연석계단< 自然石階段 >을 만들어서 해결했다.
이 집은 신미양요< 辛未洋擾 > 당시 전사< 戰死 >한 어재연< 魚在淵 > 장군< 將軍 >의 생가< 生家 >라고 전하므로 19세기< 世紀 > 초< 初 >의 건물< 建物 >로 추정< 推定 >된다. 안채, 사랑채, 광채 모두가 원형< 原形 >의 변형< 變形 >없이 비교적 잘 보존< 保存 >되었고 건물의 질도 우수하다. 그러나 광채는 훨씬 연대가 떨어지는 20세기< 世紀 > 초< 初 > 건물로 여겨지며 사랑채 역시 이때 개축< 改築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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