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190
정남향 집으로 수구< 水口 >가 서남으로 열려서 멀리 여강< 麗江 >이 바라보이며 조산< 朝山 >이 나지막하게 깔렸다. 뒷산은 낮게 중앙으로 내려오다 혈< 穴 >을 맺는데 하나는 곽씨< 郭氏 > 택< 宅 >이고 다른 하나가 이 집이다. 평면의 구성은 전체적< 全體的 >으로 ㅁ자< 字 > 모양이지만 서쪽으로 작은 사랑채가 곁달리고 사랑방 앞으로 누마루가 시설되는 등, 집 앞에 일자< 一字 >로 늘어서 있었다는 행랑채가 헐렸는데도 일견< 一見 > 사대부< 士大夫 >의 개인 취향적인 우수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남도형< 南道形 > 안방과 대청을 가로로 두고 서쪽에 부엌과 동쪽에 건넌방을 붙이면서 꺾어 배치했다. 부엌 앞에는 하님의 방인 상방을 두고 앞에는 고방을 배치했다. 건넌방 앞은 작은 부엌과 광 및 동쪽으로 꺾어져서 작은 사랑방과 작은 사랑대청, 앞퇴의 툇마루로 이루어지는 작은 사랑채를 곁들였다. 사랑채는 서쪽으로부터 큰사랑, 큰사랑대청, 사랑방, 머리대청을 일자< 一字 >로 배치하고 앞퇴에는 길게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사랑방 앞에는 마당으로 내밀어서 높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중문< 中門 >은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데 큰사랑과 상방마루 사이에 ㄱ자< 字 >로 구부려 진입토록 했다. 지금은 서쪽 담장에 설치된 조그만 문을 주로 이용하나 아마 이것은 이 집의 협문< 夾門 >이었을 것이고 원래는 앞의 행랑채에 있었을 것이다. 집 뒤뜰에는 일자형< 一字形 >의 광채가 길다랗게 놓여있다. 구조< 構造 >는 안채와 사랑채를 1고주5량으로 처리< 處理 >했는데 대청< 大廳 >만은 긴보5량으로 했다. 중도리 아래 설치한 대청 분합문< 分閤門 >은 헛기둥을 세우고 매달았기 때문에 아무때나 떼어내면 큰 공간< 空間 >을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이 가로로 놓여지는 방들은 5량으로 처리했지만 세로로 나열되는 방들은 모두 맞걸이 3량으로 결구< 結構 >했다. 댓돌은 면을 노출시킨 정다듬가공 화강암< 花崗岩 >이며 사랑채는 두벌대(2자반), 안채는 외벌대(큰한자)의 큼직하고 높은 기단< 基壇 >이다. 초석< 礎石 >은 높은 주초이고 네모기둥이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종도리에는 장혀와 헛창방을 받치며 그 사이에 소로를 끼우는 후기적< 後期的 > 수법< 手法 >을 쓰고 있다. 대공은 판대공으로 높은 사다리꼴인데 여러개의 토막판자를 겹치고 있다. 구조< 構造 >·기법< 技法 >은 정성을 들여 잘 다듬어진 우수한 것이다. 대청< 大廳 >앞도 4분합문< 分閤門 >을 달고 안방과 대청, 사랑방과 사랑대청에도 각각 분합문< 分閤門 >을 달아서 여름에는 개방< 開放 >해 놓고 시원하게 공간을 이용했을 것이다. 바깥마당의 정원시설은 이미 파괴되었으므로 크게 인상< 印象 > 깊은 것은 없다. 서쪽으로 아카시아 나무를 울창하게 심어 시야< 視野 >를 차단하며 작은사랑 앞에는 이 곳이 선비의 공부방답게 향나무 한 그루가 아름다운 자태< 姿態 >를 자랑한다. 안마당에는 중앙에 숫기왓장을 돌려서 화단을 조성< 造成 >하고 사철나무와 분도화등의 나무를 심어 사랑채와 안채와의 직접적인 시선을 차단< 遮斷 >하였다. 안마당 한쪽에는 네모꼴 반석< 盤石 >을 깔아 징검다리를 만들고 있는데 건축 당시의 조형< 造形 >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뒤뜰은 각종 나무가 울창한 뒷산과 연결되는데 뒷산의 아름다운 자연< 自然 >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동쪽 둔덕에 심어진 소나무는 고색 창연한 집의 운치< 韻致 >를 더해준다.
이 집은 고종< 高宗 >때 판서< 判書 >를 지낸 조석우가 지었다고 전하므로 건축시기는 1860년대로 추정< 推定 >된다. (조석우는 1857년 공조참판을 거쳐 1867년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건축< 建築 > 기법< 技法 >으로 미루어 그 이전으로도 추정< 推定 >되나 종도리 아래 헛창방과 소로를 끼운 점은 19세기< 世紀 > 후반< 後半 >의 수법< 手法 >으로 확인된다.
정남향 집으로 수구< 水口 >가 서남으로 열려서 멀리 여강< 麗江 >이 바라보이며 조산< 朝山 >이 나지막하게 깔렸다. 뒷산은 낮게 중앙으로 내려오다 혈< 穴 >을 맺는데 하나는 곽씨< 郭氏 > 택< 宅 >이고 다른 하나가 이 집이다. 평면의 구성은 전체적< 全體的 >으로 ㅁ자< 字 > 모양이지만 서쪽으로 작은 사랑채가 곁달리고 사랑방 앞으로 누마루가 시설되는 등, 집 앞에 일자< 一字 >로 늘어서 있었다는 행랑채가 헐렸는데도 일견< 一見 > 사대부< 士大夫 >의 개인 취향적인 우수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남도형< 南道形 > 안방과 대청을 가로로 두고 서쪽에 부엌과 동쪽에 건넌방을 붙이면서 꺾어 배치했다. 부엌 앞에는 하님의 방인 상방을 두고 앞에는 고방을 배치했다. 건넌방 앞은 작은 부엌과 광 및 동쪽으로 꺾어져서 작은 사랑방과 작은 사랑대청, 앞퇴의 툇마루로 이루어지는 작은 사랑채를 곁들였다. 사랑채는 서쪽으로부터 큰사랑, 큰사랑대청, 사랑방, 머리대청을 일자< 一字 >로 배치하고 앞퇴에는 길게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사랑방 앞에는 마당으로 내밀어서 높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중문< 中門 >은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데 큰사랑과 상방마루 사이에 ㄱ자< 字 >로 구부려 진입토록 했다. 지금은 서쪽 담장에 설치된 조그만 문을 주로 이용하나 아마 이것은 이 집의 협문< 夾門 >이었을 것이고 원래는 앞의 행랑채에 있었을 것이다. 집 뒤뜰에는 일자형< 一字形 >의 광채가 길다랗게 놓여있다. 구조< 構造 >는 안채와 사랑채를 1고주5량으로 처리< 處理 >했는데 대청< 大廳 >만은 긴보5량으로 했다. 중도리 아래 설치한 대청 분합문< 分閤門 >은 헛기둥을 세우고 매달았기 때문에 아무때나 떼어내면 큰 공간< 空間 >을 만들 수 있다. 이와 같이 가로로 놓여지는 방들은 5량으로 처리했지만 세로로 나열되는 방들은 모두 맞걸이 3량으로 결구< 結構 >했다. 댓돌은 면을 노출시킨 정다듬가공 화강암< 花崗岩 >이며 사랑채는 두벌대(2자반), 안채는 외벌대(큰한자)의 큼직하고 높은 기단< 基壇 >이다. 초석< 礎石 >은 높은 주초이고 네모기둥이다. 도리는 납도리인데 종도리에는 장혀와 헛창방을 받치며 그 사이에 소로를 끼우는 후기적< 後期的 > 수법< 手法 >을 쓰고 있다. 대공은 판대공으로 높은 사다리꼴인데 여러개의 토막판자를 겹치고 있다. 구조< 構造 >·기법< 技法 >은 정성을 들여 잘 다듬어진 우수한 것이다. 대청< 大廳 >앞도 4분합문< 分閤門 >을 달고 안방과 대청, 사랑방과 사랑대청에도 각각 분합문< 分閤門 >을 달아서 여름에는 개방< 開放 >해 놓고 시원하게 공간을 이용했을 것이다. 바깥마당의 정원시설은 이미 파괴되었으므로 크게 인상< 印象 > 깊은 것은 없다. 서쪽으로 아카시아 나무를 울창하게 심어 시야< 視野 >를 차단하며 작은사랑 앞에는 이 곳이 선비의 공부방답게 향나무 한 그루가 아름다운 자태< 姿態 >를 자랑한다. 안마당에는 중앙에 숫기왓장을 돌려서 화단을 조성< 造成 >하고 사철나무와 분도화등의 나무를 심어 사랑채와 안채와의 직접적인 시선을 차단< 遮斷 >하였다. 안마당 한쪽에는 네모꼴 반석< 盤石 >을 깔아 징검다리를 만들고 있는데 건축 당시의 조형< 造形 >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뒤뜰은 각종 나무가 울창한 뒷산과 연결되는데 뒷산의 아름다운 자연< 自然 >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동쪽 둔덕에 심어진 소나무는 고색 창연한 집의 운치< 韻致 >를 더해준다.
이 집은 고종< 高宗 >때 판서< 判書 >를 지낸 조석우가 지었다고 전하므로 건축시기는 1860년대로 추정< 推定 >된다. (조석우는 1857년 공조참판을 거쳐 1867년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건축< 建築 > 기법< 技法 >으로 미루어 그 이전으로도 추정< 推定 >되나 종도리 아래 헛창방과 소로를 끼운 점은 19세기< 世紀 > 후반< 後半 >의 수법< 手法 >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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