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
안채 대청< 大廳 > 상량문< 上樑文 >에 의하면 1888년< 年 > (광서< 光緖 > 십사년< 十四年 > 견자< 犬子 > 삼월< 三月 > 십팔일< 十八日 > 유시< 酉時 >)에 건축되었다. 집 뒤에는 얕으막한 산이 둘러있고 앞에는 조그만 개울이 흐른다. 주변< 周邊 >에 오래된 한옥이 많고 곳곳에 감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꽤 유서 깊은 마을임을 알 수 있으나 근래 도시화< 都市化 >로 말미암아 분위기가 많이 파괴되었다. 집은 모두 초가집으로 지어졌는데 튼ㅁ자형< 字形 >의 살림채와 바깥마당, 그 앞의 헛간채, 뒤안, 기타 광채들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 字形 >집인데 보간을 앞퇴를 둔 간반< 間半 > 크기로 했으며 건넌방은 상하방 2간< 間 >으로 만들어서 집머리를 ㄷ자< 字 >로 약간 구부렸다. 대청은 2간< 間 >너비이고 안방은 상하방이며 골방은 없다. 구조는 대청< 大廳 > 중앙부분< 中央部分 >이 긴보 5량이고 구들부분은 1고주5량이며 부엌은 평4량으로 했다. 기둥은 네모이고 도리는 납도리이며 보는 양측면을 수직으로 반깎아 낸 달걀모양이다. 장혀는 없는데 종도리 아래만 받쳐두었다. 추녀는 네모꼴이고 추녀 끝이 썩지 않도록 그 가운데에 암기와를 한 장 얹어두었으며 서까래는 아주 잘 다듬어져 있다. 평고대 위에는 빗물이 그 끝사이로 스며들지 않도록 흙을 발라두었고 지붕은 초가인데 두께는 대단히 두꺼워서 한자 반 가량이며 그 끝이 부른지붕으로 많이 숙였다. 안방 앞문은 가운데 정자< 井字 > 살을 가진 불발기 쌍문으로 되었고 창은 용자< 用字 > 창으로 꾸몄다. 민가< 民家 >로서는 전체적으로 법식< 法式 >에 따라 정성껏 지은 집이다. 사랑채 역시 곱은자꼴로 안채를 엇비슷하게 막으며 ㄴ자< 字 >를 이룬다. 사랑방이 위아랫방으로 안채와 직각되게 배치되고 대문< 大門 >이 부엌을 향하게 계획되었다. 마당 앞에는 헛간, 오양간, 구들이 배치되었다.
구조는 맞걸이 3량 구조인데 다만 사랑방 부분만 1고주5량으로 처리해서 구들 앞에 2간< 間 > 마루방을 시설하고 있다. 마루방은 보간이 큰 반간< 半間 >으로서 특이한 점은 바깥마당 부분의 창< 窓 >에 모두 덧문을 달아서 판장문으로 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19세기 말에 화적< 火賊 >떼들의 피해가 너무 심했으므로 밖으로 통하는 모든 문은 판장문으로 보호한 때문이다. 이 집 역시 원래< 元來 > 초가집이었으며 사랑방의 보간이 커서 용마루가 마치 낙타등 모양의 율동을 가졌다. 바깥마당 맞은편에는 5간< 間 >의 헛간채가 마련되었는데 건축년대< 建築年代 >는 20세기 중엽 정도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둘러쌌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틔였고 헛간채 남쪽에 비겨서 마당 안으로 진입< 進入 >하는 판석통로< 板石通路 >는 입구< 入口` >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인상적이다. 뒤안에는 우물 및 향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등이 심어졌고 구석에 단간< 單間 > 초가인 광채가 자리해서 민가 뒤안 정원시설의 정취< 情趣 >를 한 껏 풍겨준다. 기타 살림채의 곁채들은 연륜< 年輪 >이 별로 들지 않았으며 여기 광채만이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년대로 보인다.
안채 대청< 大廳 > 상량문< 上樑文 >에 의하면 1888년< 年 > (광서< 光緖 > 십사년< 十四年 > 견자< 犬子 > 삼월< 三月 > 십팔일< 十八日 > 유시< 酉時 >)에 건축되었다. 집 뒤에는 얕으막한 산이 둘러있고 앞에는 조그만 개울이 흐른다. 주변< 周邊 >에 오래된 한옥이 많고 곳곳에 감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꽤 유서 깊은 마을임을 알 수 있으나 근래 도시화< 都市化 >로 말미암아 분위기가 많이 파괴되었다. 집은 모두 초가집으로 지어졌는데 튼ㅁ자형< 字形 >의 살림채와 바깥마당, 그 앞의 헛간채, 뒤안, 기타 광채들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평범한 ㄱ자형< 字形 >집인데 보간을 앞퇴를 둔 간반< 間半 > 크기로 했으며 건넌방은 상하방 2간< 間 >으로 만들어서 집머리를 ㄷ자< 字 >로 약간 구부렸다. 대청은 2간< 間 >너비이고 안방은 상하방이며 골방은 없다. 구조는 대청< 大廳 > 중앙부분< 中央部分 >이 긴보 5량이고 구들부분은 1고주5량이며 부엌은 평4량으로 했다. 기둥은 네모이고 도리는 납도리이며 보는 양측면을 수직으로 반깎아 낸 달걀모양이다. 장혀는 없는데 종도리 아래만 받쳐두었다. 추녀는 네모꼴이고 추녀 끝이 썩지 않도록 그 가운데에 암기와를 한 장 얹어두었으며 서까래는 아주 잘 다듬어져 있다. 평고대 위에는 빗물이 그 끝사이로 스며들지 않도록 흙을 발라두었고 지붕은 초가인데 두께는 대단히 두꺼워서 한자 반 가량이며 그 끝이 부른지붕으로 많이 숙였다. 안방 앞문은 가운데 정자< 井字 > 살을 가진 불발기 쌍문으로 되었고 창은 용자< 用字 > 창으로 꾸몄다. 민가< 民家 >로서는 전체적으로 법식< 法式 >에 따라 정성껏 지은 집이다. 사랑채 역시 곱은자꼴로 안채를 엇비슷하게 막으며 ㄴ자< 字 >를 이룬다. 사랑방이 위아랫방으로 안채와 직각되게 배치되고 대문< 大門 >이 부엌을 향하게 계획되었다. 마당 앞에는 헛간, 오양간, 구들이 배치되었다.
구조는 맞걸이 3량 구조인데 다만 사랑방 부분만 1고주5량으로 처리해서 구들 앞에 2간< 間 > 마루방을 시설하고 있다. 마루방은 보간이 큰 반간< 半間 >으로서 특이한 점은 바깥마당 부분의 창< 窓 >에 모두 덧문을 달아서 판장문으로 막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19세기 말에 화적< 火賊 >떼들의 피해가 너무 심했으므로 밖으로 통하는 모든 문은 판장문으로 보호한 때문이다. 이 집 역시 원래< 元來 > 초가집이었으며 사랑방의 보간이 커서 용마루가 마치 낙타등 모양의 율동을 가졌다. 바깥마당 맞은편에는 5간< 間 >의 헛간채가 마련되었는데 건축년대< 建築年代 >는 20세기 중엽 정도로 추측된다. 살림채는 담장으로 둘러쌌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틔였고 헛간채 남쪽에 비겨서 마당 안으로 진입< 進入 >하는 판석통로< 板石通路 >는 입구< 入口` >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인상적이다. 뒤안에는 우물 및 향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등이 심어졌고 구석에 단간< 單間 > 초가인 광채가 자리해서 민가 뒤안 정원시설의 정취< 情趣 >를 한 껏 풍겨준다. 기타 살림채의 곁채들은 연륜< 年輪 >이 별로 들지 않았으며 여기 광채만이 안채와 거의 같은 건축년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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