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산19
박세채(1631∼1695)는 이조참판<吏曹參判>·우찬성<右贊成>·우의정을 지냈으며, 예학<禮學>을 집대성하고 탕평<蕩平>의 원칙론을 수립하여 당쟁의 갈등 해소에 노력한 대표적 문신이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18현<賢> 중의 한 분으로서 평산의 구봉서원<九峰書院>,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등 여러 곳의 서원에도 배향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그려진 관복 차림의 상<像>과 유학 복식 차림의 상<像> 두 점이 전한다. 관복 차림의 초상화는 93㎝ ×175㎝ 크기로, 높은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 차림에공경의 뜻으로 두 손을 마주 잡은 공수<拱手> 자세로 호피<虎皮>를 깐 중국식의 교의에 앉아있는 정면교의좌상<正面交椅坐像>으로 공신도 형식의 그림이다. 신체는 당당한 체구에 두 발을 팔자형으로 벌린 채 족좌대에 올려 놓았으며, 얼굴의 미세한 주름과 눈썹, 수염 등을 꼼꼼한 필치로 묘사해 매우 사실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녹색포 역시 농담을 달리했으며, 의습선은 진한 먹선으로 몇 개만 간략하게 표현했다. 가슴에는 쌍학문의 흉배를 두르고 있어 우찬성이 된 60세 전후 시기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호피가 깔린 의자는 17세기를 전후한 공신도 형식에서 볼 수 없는 특징으로 17세기 중엽 이후 중국적인 요소가 당시 초상화 기법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유학 복식 차림의 상은 크기 104㎝×180㎝로, 각이 진 높은 동파관<東坡冠>을 쓴 유복 차림의 전신정면입상<全身正面立像>이다. 얼굴 부분의 골격과 수북한 눈썹, 눈가의 둥근 주름,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 등에서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지고 의습선은 몇 개의 간일한 선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당대 최고의 유학자다운 풍모와 인품이 느껴진다. 이 초상화의 제작 시기는 남계가 60세 이후에서 죽기 전까지의 몇 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박세채(1631∼1695)는 이조참판<吏曹參判>·우찬성<右贊成>·우의정을 지냈으며, 예학<禮學>을 집대성하고 탕평<蕩平>의 원칙론을 수립하여 당쟁의 갈등 해소에 노력한 대표적 문신이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는 18현<賢> 중의 한 분으로서 평산의 구봉서원<九峰書院>,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등 여러 곳의 서원에도 배향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비단 바탕에 그려진 관복 차림의 상<像>과 유학 복식 차림의 상<像> 두 점이 전한다. 관복 차림의 초상화는 93㎝ ×175㎝ 크기로, 높은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 차림에공경의 뜻으로 두 손을 마주 잡은 공수<拱手> 자세로 호피<虎皮>를 깐 중국식의 교의에 앉아있는 정면교의좌상<正面交椅坐像>으로 공신도 형식의 그림이다. 신체는 당당한 체구에 두 발을 팔자형으로 벌린 채 족좌대에 올려 놓았으며, 얼굴의 미세한 주름과 눈썹, 수염 등을 꼼꼼한 필치로 묘사해 매우 사실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녹색포 역시 농담을 달리했으며, 의습선은 진한 먹선으로 몇 개만 간략하게 표현했다. 가슴에는 쌍학문의 흉배를 두르고 있어 우찬성이 된 60세 전후 시기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호피가 깔린 의자는 17세기를 전후한 공신도 형식에서 볼 수 없는 특징으로 17세기 중엽 이후 중국적인 요소가 당시 초상화 기법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유학 복식 차림의 상은 크기 104㎝×180㎝로, 각이 진 높은 동파관<東坡冠>을 쓴 유복 차림의 전신정면입상<全身正面立像>이다. 얼굴 부분의 골격과 수북한 눈썹, 눈가의 둥근 주름,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 등에서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지고 의습선은 몇 개의 간일한 선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당대 최고의 유학자다운 풍모와 인품이 느껴진다. 이 초상화의 제작 시기는 남계가 60세 이후에서 죽기 전까지의 몇 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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