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 良洞 >마을은 경주< 慶州 >에서 형산강< 兄山江 > 줄기를 따라 동북< 東北 > 포항< 浦項 >쪽으로 40리< 里 >를 들어가서 위치< 位置 >하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형산강< 兄山江 >의 물도 깊어서 선박< 船舶 >이 일상< 日常 > 내왕< 來往 >했으므로 수운편< 水運便 >도 좋은 편이고 해산물< 海産物 >의 교역< 交易 >도 쉽게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마을 자체< 自體 >는 안강평야< 安康平野 >에 임< 臨 >한 셈이나 서향< 西向 >한 좁은 골안에 다시 남향< 南向 >해서 물자형< 勿字形 >으로 이루어진 산< 山 >골의 산< 山 >등성이나 골에 집들이 산재< 散在 >해 있다. 그 가옥< 家屋 >들 중< 中 >에는 전국< 全國 >에서도 보기드물만큼 다수< 多數 >의 가옥< 家屋 >이 규모< 規模 >를 갖춘 와즙반가< 瓦葺班家 >들이며 그 집단부락< 集團部落 >인 점에 큰 특색< 特色>이 있다 하겠다. 그 반가< 班家 >들은 모두 산< 山 >등성이나 중허리에 터를 잡았고 산< 山 >에는 샘이 귀< 貴 >하여 식수< 食水 >는 거의 모두가 산하< 山下 >에서 길어 올려다가 사용한다는 점도 이 마을의 특색< 特色 >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옛날에는 넓은 안강평야< 安康平野 >의 옥답< 玉沓 >들이 대략 양동반가< 良洞班家 >들의 소유< 所有 >였다고 하거니와 양동< 良洞 >은 구신분제도< 舊身分制度 > 사회< 社會 >에서 많은 소작인< 小作人 >과 하인< 下人 >들을 거느린 양반< 兩班 >들이 세거< 世居 >하기에 알맞는 마을이었다고 하겠다. 양동< 良洞 >의 반촌적< 班村的 > 구성< 構成 >은 월성손씨< 月城孫氏 >와 여강손씨< 驪江李氏 >의 양대문벌< 兩大門閥 >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 양성< 兩姓 >의 동족집단부락< 同族集團部落 >인 셈이다. 마을의 식자< 識者 >들은 넓은 평야< 平野 >에 임< 臨>한 이곳 물자형< 勿字形 > 산곡< 山谷 >이 경주< 慶州 >에서 흘러드는 형산강< 兄山江 > 물줄기를 서남간방< 西南間方 >의 역수< 逆水 >로 맞는 지형< 地形 >이어서 이 역수< 逆水 >는 이마을의 끊임없는 부< 富 >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역수지부< 逆水之富 >의 상징이 일차적< 一次的 >으로는 안강평야< 安康平野 >인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양동< 良洞 >마을의 큰집들은 모두가 손< 孫 > ·이씨< 李氏 >들의 종가< 宗家 >, 파종가< 派宗家>들이고 특히 이씨< 李氏 >들은 파손< 派孫 >이 여러 갈래이고 파손< 派孫 >마다 정자< 亭子 >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종손< 宗孫 >인 무첨당파< 無첨堂派 >, 이손< 二孫 >인 양졸정파< 養拙亭派 >(영귀정< 詠歸亭 >), 삼손< 三孫 > 설천정파< 雪川亭派 >, 사손< 四孫 > 수졸당파< 守拙堂派 >(무정자< 無亭子 >), 오손< 五孫 >인 오위정파< 五衛亭派 >(재< 在 > 영일군< 迎日郡 >) 등 지손< 支孫 >들의 파명< 派名 >에 정자< 亭子>를 붙여 부르고 있었으며 모든 파손< 派孫 >에 정자< 亭子 >가 있었으나 수졸당파< 守拙堂派 >만은 정자< 亭子 >가 없었다고 한다. 종가< 宗家 >, 정자< 亭子 >와 함께 재실< 齋室 >, 비각< 碑閣 >, 족보< 族譜 >, 문집< 文集 >, 고문서< 古文書 >, 위토답< 位土沓 > 등은 이 마을 양반< 兩班 >의 권위< 權威 >의 상징< 象徵 >으로 되어왔다고 한다. 200년< 年 > 이상< 以上 >의 역사를 지닌 큰집들이 30동< 棟 >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종가< 宗家 >일수록 산< 山 >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에 위치하고 파종가< 派宗家 >들은 좀 낮은 자리에 위치한다는 것도 반가< 班家 >의 배열< 配列 > 법도< 法度 >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산상< 山上 > 반가< 班家 >들은 과거 솔거노비< 率居奴婢 >의 주거< 住居 >이던 행랑채를 두거나 또 외거노비< 外居奴婢 >의 살림집인 가랍집을 주위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대개 초가< 草家 >들이었다. 현재 양동< 良洞 >마을 내< 內 >에 보물< 寶物 >이나 중요민속자료< 重要民俗資料 >로 지정< 指定 >된 가옥< 家屋 >은 모두 15가호< 家戶 >인데 그중 가장 오랜 예< 例 >는 손동만씨< 孫東滿氏 >의 서백당< 書百堂 >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반가< 班家 >들의 기본구조< 基本構造 >는 대개 ㅁ자형< 字形 >이거나 튼ㅁ자형< 字形 >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ㅁ자외< 字外 >에 대문< 大門 >앞에 행랑< 行廊 >채를 둔 예< 例 >도 있다. 예외적< 例外的 >인 것으로 ㄱ자< 字 >나 일자< 一字 >집을 여러동< 棟 > 혼합< 混合 > 배치< 配置 >하는 예< 例 >도 있으나 내부< 內部 >구조에 있어 공통적< 共通的 >으로 영남지방< 嶺南地方 >의 특색< 特色 >을 보이는 것은 안방과 부엌의 횡접< 橫接 >관계, 작은사랑과 안사랑의 구비< 具備 >, 안대청< 大廳 >, 사랑대청< 大廳 >의 원주사용< 圓柱使用 >, 지붕합각< 合閣 >의 처리 등이며 간혹 중부< 中部 >, 서울식인 안방, 부엌의 하접형식< 下接形式 >이나 동< 棟 > 배치< 配置 >의 분산< 分散 > 등 예외적< 例外的 >인 것도 있다.
양동< 良洞 >마을은 경주< 慶州 >에서 형산강< 兄山江 > 줄기를 따라 동북< 東北 > 포항< 浦項 >쪽으로 40리< 里 >를 들어가서 위치< 位置 >하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형산강< 兄山江 >의 물도 깊어서 선박< 船舶 >이 일상< 日常 > 내왕< 來往 >했으므로 수운편< 水運便 >도 좋은 편이고 해산물< 海産物 >의 교역< 交易 >도 쉽게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마을 자체< 自體 >는 안강평야< 安康平野 >에 임< 臨 >한 셈이나 서향< 西向 >한 좁은 골안에 다시 남향< 南向 >해서 물자형< 勿字形 >으로 이루어진 산< 山 >골의 산< 山 >등성이나 골에 집들이 산재< 散在 >해 있다. 그 가옥< 家屋 >들 중< 中 >에는 전국< 全國 >에서도 보기드물만큼 다수< 多數 >의 가옥< 家屋 >이 규모< 規模 >를 갖춘 와즙반가< 瓦葺班家 >들이며 그 집단부락< 集團部落 >인 점에 큰 특색< 特色>이 있다 하겠다. 그 반가< 班家 >들은 모두 산< 山 >등성이나 중허리에 터를 잡았고 산< 山 >에는 샘이 귀< 貴 >하여 식수< 食水 >는 거의 모두가 산하< 山下 >에서 길어 올려다가 사용한다는 점도 이 마을의 특색< 特色 >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옛날에는 넓은 안강평야< 安康平野 >의 옥답< 玉沓 >들이 대략 양동반가< 良洞班家 >들의 소유< 所有 >였다고 하거니와 양동< 良洞 >은 구신분제도< 舊身分制度 > 사회< 社會 >에서 많은 소작인< 小作人 >과 하인< 下人 >들을 거느린 양반< 兩班 >들이 세거< 世居 >하기에 알맞는 마을이었다고 하겠다. 양동< 良洞 >의 반촌적< 班村的 > 구성< 構成 >은 월성손씨< 月城孫氏 >와 여강손씨< 驪江李氏 >의 양대문벌< 兩大門閥 >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들 양성< 兩姓 >의 동족집단부락< 同族集團部落 >인 셈이다. 마을의 식자< 識者 >들은 넓은 평야< 平野 >에 임< 臨>한 이곳 물자형< 勿字形 > 산곡< 山谷 >이 경주< 慶州 >에서 흘러드는 형산강< 兄山江 > 물줄기를 서남간방< 西南間方 >의 역수< 逆水 >로 맞는 지형< 地形 >이어서 이 역수< 逆水 >는 이마을의 끊임없는 부< 富 >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역수지부< 逆水之富 >의 상징이 일차적< 一次的 >으로는 안강평야< 安康平野 >인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양동< 良洞 >마을의 큰집들은 모두가 손< 孫 > ·이씨< 李氏 >들의 종가< 宗家 >, 파종가< 派宗家>들이고 특히 이씨< 李氏 >들은 파손< 派孫 >이 여러 갈래이고 파손< 派孫 >마다 정자< 亭子 >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종손< 宗孫 >인 무첨당파< 無첨堂派 >, 이손< 二孫 >인 양졸정파< 養拙亭派 >(영귀정< 詠歸亭 >), 삼손< 三孫 > 설천정파< 雪川亭派 >, 사손< 四孫 > 수졸당파< 守拙堂派 >(무정자< 無亭子 >), 오손< 五孫 >인 오위정파< 五衛亭派 >(재< 在 > 영일군< 迎日郡 >) 등 지손< 支孫 >들의 파명< 派名 >에 정자< 亭子>를 붙여 부르고 있었으며 모든 파손< 派孫 >에 정자< 亭子 >가 있었으나 수졸당파< 守拙堂派 >만은 정자< 亭子 >가 없었다고 한다. 종가< 宗家 >, 정자< 亭子 >와 함께 재실< 齋室 >, 비각< 碑閣 >, 족보< 族譜 >, 문집< 文集 >, 고문서< 古文書 >, 위토답< 位土沓 > 등은 이 마을 양반< 兩班 >의 권위< 權威 >의 상징< 象徵 >으로 되어왔다고 한다. 200년< 年 > 이상< 以上 >의 역사를 지닌 큰집들이 30동< 棟 >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종가< 宗家 >일수록 산< 山 >등성이의 높고 넓은 터에 위치하고 파종가< 派宗家 >들은 좀 낮은 자리에 위치한다는 것도 반가< 班家 >의 배열< 配列 > 법도< 法度 >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산상< 山上 > 반가< 班家 >들은 과거 솔거노비< 率居奴婢 >의 주거< 住居 >이던 행랑채를 두거나 또 외거노비< 外居奴婢 >의 살림집인 가랍집을 주위에 배치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대개 초가< 草家 >들이었다. 현재 양동< 良洞 >마을 내< 內 >에 보물< 寶物 >이나 중요민속자료< 重要民俗資料 >로 지정< 指定 >된 가옥< 家屋 >은 모두 15가호< 家戶 >인데 그중 가장 오랜 예< 例 >는 손동만씨< 孫東滿氏 >의 서백당< 書百堂 >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반가< 班家 >들의 기본구조< 基本構造 >는 대개 ㅁ자형< 字形 >이거나 튼ㅁ자형< 字形 >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ㅁ자외< 字外 >에 대문< 大門 >앞에 행랑< 行廊 >채를 둔 예< 例 >도 있다. 예외적< 例外的 >인 것으로 ㄱ자< 字 >나 일자< 一字 >집을 여러동< 棟 > 혼합< 混合 > 배치< 配置 >하는 예< 例 >도 있으나 내부< 內部 >구조에 있어 공통적< 共通的 >으로 영남지방< 嶺南地方 >의 특색< 特色 >을 보이는 것은 안방과 부엌의 횡접< 橫接 >관계, 작은사랑과 안사랑의 구비< 具備 >, 안대청< 大廳 >, 사랑대청< 大廳 >의 원주사용< 圓柱使用 >, 지붕합각< 合閣 >의 처리 등이며 간혹 중부< 中部 >, 서울식인 안방, 부엌의 하접형식< 下接形式 >이나 동< 棟 > 배치< 配置 >의 분산< 分散 > 등 예외적< 例外的 >인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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